朴대통령의 격려
1966년 6월24일, 林錫珍 부부는 서울에 도착했고 그 해 가을부터 서울대학 교에서 현대철학 강의를 맡았다. 11월경 林錫珍 교수는 훗날 한국 사회의 인문과학계에 내로라 하는 이름들을 갖게 되는 동료들과 저녁 술좌석에 합 류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林錫珍은 북한에 다녀왔다는 말은 못했지만 , 자신이 체험한 북한 체제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자 동료들은 林錫珍의 의견을 한사코 부정하면서 그들이 상상하는 북한을 제시하곤 했다. 林錫珍은 반동 부르주아 지식인으로 몰렸고 이들과는 1990년 초 사회주의권이 붕괴된 후에야 비로소 다시 만날 정도로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지식인 사회의 풍경이었다.
해가 바뀌어 1967년이 되자 林錫珍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서울대, 서 강대 등에 강의를 나가며 명지대학교 교양학부 조교수 자리를 얻었다. 李基陽 특파원이 실종되기 한 달 전쯤 林錫珍은 독일서 함께 공부했으며 북한에 포섭되었던 친구 某씨를 만났다. 林錫珍은 그에게 『함께 정리하자』고 제 의했다. 그 친구는 『그렇게까지 용단내릴 일이 아닌 것 같다』며 끝내 거 절했다. 이 사건이 林錫珍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의 속마음을 털어 놓은 셈이었는데, 거절 당했습니다. 그 친구가 만약 北쪽에 이런 사실을 전해버리면 어떻게 되나 하는 생각에 잠을 못잘 정도 가 되었어요. 훗날 알게 되었지만 그 친구는 끝내 나의 입장을 이해해주고 비밀을 지켜주었습니다』
1967년 5월14일 李基陽 특파원의 실종 보도가 알려졌을 때 林錫珍은 生死의 갈림길에 선 자신을 발견했다.
『다른 문제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유럽 동포들에 대한 북한의 공작 실태 가 한국사회에 알려지면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북한에서는 당 고 위층을 포함, 나와 관계된 이들은 이 사실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을까 등등 엄청난 고민이 시작된 겁니다.
대한민국 출신의 젊은 유학생들이 오죽하면 집단으로 움직이다시피 하면서 순간적인 착각으로 조국과 등을 돌리게 되었나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요. 사회적 비리와 피폐한 상황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정리가 되더군요. 그 렇다면 이 사건이 알려질 때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릴 수도 있다고 보았습 니다』
그리고 朴正熙 대통령을 만난 것이다. 林錫珍은 朴대통령에게 말미에 이런 식의 救命 운동을 했다고 한다.
『각하, 단순한 동기와 목적과 수단으로 대한민국의 젊은 지식인들을 자기 네 수족으로 붙들어 놓을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부탁 드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 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사람 도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순수한 동기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다 말려들었습니 다. 이들도 살려주십시오』
朴正熙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너그럽게 선처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1967년 5월17일 오후, 청와대에서 朴대통령과 만나 2시간5분 동안 털어 놓 은 이야기의 끝부분은 이같은 내용이었다. 朴대통령은 가끔씩 굳은 결심을 할 때나 그렇듯 어금니를 깨물어 얼굴 근육에 힘이 들어가는 것 외에는 표 정의 변화가 없었다. 면담을 마치고 일어서는 林錫珍과 악수를 나누면서 朴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
『林선생, 앞으로 사회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보장해 드릴 테니 염려 말고 열심히 일하십시오』
林錫珍은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朴대통령이 다시 『林선생』하 고 불렀다.
『예?』
『지금 하신 말씀을 글로 써서 빨리 갖다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참, 中情에서 연락이 오면 협조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林錫珍은 그날 밤부터 200자 원고지 200장 가량의 글을 써 이틀 뒤 洪世杓 에게 전달한다. 최근 기자와 만난 林錫珍 명예 교수는 朴대통령에 대해 이 런 소감을 털어 놓았다.
『朴正熙 대통령은 제 생명의 은인입니다. 세상이 흉흉해서 朴대통령을 독 재자라고 힐난하고 있지만 이 분은 훗날 우리 역사에 특기할 만한 자리를 차지할 겁니다. 누구는 어디에 끌려가 모진 고생을 했다며 朴대통령을 비난 하는데, 그 양반은 쉽게 사람을 옭아매고 죽이는 걸 삼가는 분입니다. 그 분이 어릴 때 고생하고 자랐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풀 캐어 먹고 살아야 했던 이 민족을 가난의 구렁텅이에서 이 정도로 끌어냈다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부정될 수 없을 것입니다. 南과 北을 들여다 보니 더욱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1967년 5월22일 오전, 서울 갈현동 자택에 머물던 林錫珍은 전화를 하고 온 중앙정보부 직원과 함께 남산 분실로 갔다. 金炯旭 정보부장실로 안내되었 다. 金炯旭과 林錫珍은 예전에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한 번 만난 사이기도 했다. 林錫珍 교수를 맞이한 金炯旭은 『아이고, 林박사 아니십니까』하며 『그런 일이 있으면 저한테 직접 오시지 않고』라고 말했다. 대통령에 직 접 보고한 것이 불쾌하다는 뜻이었다고 林교수는 회고했다. 그러나 金炯旭 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林錫珍 교수가 자신에게 찾아와 자수했다고 쓰고 朴 대통령과의 부분은 완전히 누락시키고 있다.
林교수는 이 자리에서 金炯旭 정보부장에게도 부탁을 했다고 한다.
『희생자가 덜 나면서 사회적 물의가 크게 일어나지 않고 북한을 정면으로 자극하지 않게 내면적으로 처리하는 길을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金炯旭은 일을 제대로 처리할 능력이 없는 사람 같아 불안했습니다. 결과는 예측한 대로 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