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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德新을 살려준 朴대통령
 崔德新을 살려준 朴대통령
 
 崔德新은 1914년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태어나 1936년 중국 남경 육군중앙군 관학교를 졸업했다. 1946년 육군 경비사관학교 특별반을 거쳐 1956년에 육 군 중장으로 예편했고, 1956년부터 1961년까지 駐월남 대사로, 1961년 5· 16 이후 외무부장관으로 재직한 뒤 1963년 12월 서독 대사로 발령받았다. 그는 東伯林 사건 이후 1977년까지 천도교 교령을 지내다가 공금횡령 등 비 리로 교단의 배척을 받자 그 해 미국으로 망명했다(崔德新의 뒤를 이어 천 도교 교령이 된 吳益濟는 이후 국민회의 고문을 지내다가 1997년 8월15일 월북했다). 崔德新은 미국에서 反체제활동을 벌이다 1986년 4월 부부가 함 께 북한으로 들어갔다.
 
 그는 북한에서 對南 전위조직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과 천도교 청 우당 중앙위원장, 조선종교인협회 회장 등을 맡아 金日成-金正日 부자 체제 선전과 對南 평화공세의 선전장에 동원됐다. 1989년 崔가 75세로 사망하자 북한은 國家葬(국가장)으로 성대한 장례를 치러 주었다. 崔德新의 부인 유 미영은 천도교 중앙지도위원회 위원장직을 이어받아 남편을 대신해 활동하 며 1995년 安浩相(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의 밀입북 당시 초청자로도 활 동했다.
 
 崔德新의 아버지 최동오는 일제시대에 만주에서 목사로서 독립운동을 했던 臨政 계열의 독립운동가였다. 金日成은 중학교 在學(재학)시절 기숙사에 묵고 있을 때 최동오 목사와 친분을 맺었고, 훗날 만주에서 金日成이 경찰 에 잡혀 구금되었을 때 그를 구사일생으로 살려준 사람이 최동오였다. 이런 이유로 해방 후 북한에서 정권을 잡은 金日成은 월남하지 못한 최동오를 극진히 대우해 주었고 1963년 최동오가 사망하자 혁명 열사릉에 안장했으며 평소에도 「선생」이란 호칭보다 「동지」라는 호칭을 쓸 만큼 각별했다고 한다.
 
 李龍澤 당시 수사과장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林錫珍 교수가 써 준 진술서를 바탕으로 崔德新 대사의 주변을 조 사했더니 이미 尹伊桑의 下部線과 접촉하여 아버지의 소식을 타진했고 北측 과 접촉도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崔德新은 東伯林 사건에서 조사를 받지 않고 무사히 빠져 나갔을 까. 당시 李龍澤 과장은 金炯旭 부장을 거치지 않고 이 사실을 朴대통령에 게 직접 보고했다고 한다. 그런데.
 
 『李과장, 거 신중하게 하시오. 좀 더 철저하게 수사해 보고. 崔대사도 고 향이 이북이니 어쩌면 北에서 마수를 뻗쳤는지도 모르지…. 개인적으로는 효자인데, (만약 사실이라면) 법률적으로는 안되는 것 아니야…』李龍澤 前 의원은 이렇게 회고했다.
 
 『崔德新은 朴대통령이 軍시절 때부터 개인적으로 좋아한 인물입니다. 그런 데 장관을 지내고 현직 대사로 나가 북한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로 판명될 경우 朴대통령 개인과 정권에도 큰 흠이 될 만한 사안이었습니다. 朴대통령이 「신중하게 하라」는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우리는 崔德新을 주 목하기만 하고 극도의 보안을 기했습니다. 자칫하면 망명할 것으로 보았지 요. 이때문에 崔德新은 東伯林 사건 관련자들을 소환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소외되었다며 우리에게 감정이 상한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서독과 프랑스에서 혐의가 있는 관련 당사자들을 소한하는 과정에서 외교적 마찰이 빚어질 때 崔德新은 소극적인 대응을 했다. 그리고 자신은 서독 정 부의 항의로 도저히 대사직을 수행하지 못하겠다며 본국 소환을 요청했다. 이런 행동을 하고 있던 崔德新에 대해 金炯旭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 록하고 있다.
 
 <현지에 도착한 요원들은 대사 崔德新에게 특수임무를 알리지 않고 임무수 행 동안 기밀유지를 위해 대사관의 모든 공문서, 전보의 발신 및 수신을 통 제했다. 나중에 이를 안 양심적인 외교관 崔德新이 우리 임무에 非협조적이 고 국제적인 문제가 야기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시간이 급해. 그 사람의 우려는 이해하지만 할 수 없소. 강행하시오(金炯旭의 말)』>
 
 한 나라의 정보부장이 북한과 선이 닿아 있던 대사를 두고 「양심적인 외교 관」이란 修辭를 써야 하는 배경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朴대통령이 崔대사의 소환 요청을 수락하여 본국으로 불러들였을 때, 崔대 사는 청와대로 들어 가 대통령에게 東伯林 사건을 보고했다. 李龍澤 前 의 원의 증언-.
 
 『崔德新은 사건 전말을 대통령께 보고하면서도 자기가 북한측 요원들과 접 촉했다는 사실은 쏙 빼버립디다. 그리고는 한 술 더 떠 자신도 북괴로부터 친인척 상봉 제의를 받았지만 한 마디로 거절했다고 보고했던 겁니다』朴正熙 대통령은 崔德新의 거짓말을 알고 있었을까.
 
 『알고 계셨다고 봅니다. 제가 보고 드린 것과 崔대사의 진술에서 드러나는 차이를 금방 눈치챘을 테니까요. 崔德新은 그 후 朴대통령이 다른 국가의 대사로 내 보낼 줄 알고 기다렸지만 朴대통령은 崔대사를 해외로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외무장관을 지낸 사람을 국내에만 묶어 둔 이유가 무엇이었겠 습니까』
 
 崔德新은 朴대통령이 대사로 발령을 내리지 않자 朴대통령에게 천도교 교령 자리를 원했다고 한다. 다시 李龍澤 前 의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해 말, 崔德新은 천도교 교령에 앉게 해 달라고 朴대통령께 부탁한 모 양입니다. 하루는 대통령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내무부 장관에게도 지시했 는데 천도교 교령 선거에 崔德新 대사가 될 수 있도록 힘을 써 보게」라고 지시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中情 요원들이 천도교의 각 지방 대의원들을 만나 부탁을 하고 다녀야 했습니다. 결국 교령으로 추대가 되었지만 실제는 官選 교령이었던 셈입니다』
 
 李龍澤은 중앙정보부에서 극비리에 崔德新을 계속 주목했다고 한다. 1977년 , 崔德新은 천도교 교령을 연임했지만, 경리부정사건이 터지자 미국으로 망 명했다. 그리고 1986년 4월에 북한으로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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