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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와 「도피」
 「납치」와 「도피」
 
 1967년 6월 초, 중앙정보부는 林錫珍의 진술을 바탕으로 다섯 쌍의 부부를 포함해 23명의 혐의 대상자 명단을 최초로 작성했다. 수사관들은 이 명단 을 토대로 인맥을 그려나가면서 12명을 추가하고, 며칠 뒤 13명을 추가하여 총 48명의 교포 및 유학생들을 명단에 집어 넣었다.
 
 중앙정보부는 이들 48명을 A급, B급, C급으로 나누었다. 尹伊桑, 李應魯 같 은 거물급은 A급, 학위를 마치고 교편을 잡 고 있던 젊은 교수들은 B급, 유 학생들과 派獨광부들은 C급이었다. 6·8선거가 끝난 이틀 뒤인 6월10일, 정 보부는 특수공작 책임자를 현지에 급파했다. 이후 총39명의 공작요원들을 서독과 프랑스로 보냈다. 6월15일 현지에 도착한 정보부 요원들은 다음날 3명 1개 조로 편성하여 혐의 대상자가 거주하는 서독과 프랑스 등의 20여개 지점으로 출발, 혐의 대상자와 접촉했다.
 
 A, B급 혐의 대상자들에게는 朴대통령의 초청이라 속이고 8·15 광복절 행 사에 참석토록 모시러 왔다고 했다. 비행기를 전세냈다며 여권과 항공권까 지 대사관에서 알아서 마련해 줄 것이라고 설득해 대부분이 이 말에 넘어갔 다. C급 대상자는 한국 정부 당국에서 귀하의 활동에 의심나는 것이 있으니 한국에 들어가 해명하고 오자는 식의 半협박을 했다.
 
 사흘간에 걸쳐 독일 본의 한국 대사관으로 30명을 집결시켰다. 총 48명 중 10명은 혐의가 없다고 판명되었고, 나머지 8명은 눈치채고 도주하여 대부 분이 북한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집결한 30명 중에는 프랑스에서 자동차로 獨佛 국경을 넘어 온 10여 명도 있었다.
 
 당시 프랑스 파리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공보관으로 근무했던 李基鐸(이기 택·現 연세대학교 정외과 교수)씨는 임기를 마치고 귀국 준비를 하던 중 서독 본에 있던 한국 대사관에서 急電이 들어오는 것을 목격했다. 내용은 대사를 제외한 공사 및 참사관 이하 직원들은 비상대기하라는 지시 였다. 잠시후 본에서 북괴 공작에 포섭되어 긴급 호송할 인물들의 명단을 암호전문으로 보낼 테니 해독준비를 하라고 했다. 암호를 다룰 상황이 아니 라고 하자 이름을 거꾸로 부를 테니 받아 적으라고 했다. 李基鐸 교수의 회고.
 
 『직원들이 긴장감에 싸인 채 전화에서 흘러 나오는 이름들이 하얀 종이 위 에 쓰여져 내려가는 걸 보았습니다. 그리고 모두 경악했습니다. 열댓명 가 량 되었는데 대부분이 대사관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유학생들은 전부가 대사관에서 용역을 하던 사람들이었고 무관부 소속의 직원도 있었 습니다.
 
 기밀이 얼마나 빠져나갔을까 생각하면 소름끼치는 일이었습니다』駐佛대사는 대사관 직원들의 여권을 모아 정보부 요원에게 넘겼다. 이 여권 들은 즉석에서 혐의자들의 위조여권으로 둔갑했다. 혐의자들을 독일로 호송 하기 위해 사진을 감쪽같이 바꿔 붙여 혐의자들의 여권으로 위조한 것이다 . 駐佛대사관 직원들은 차량을 동원하고 연이어 도착한 수사관들과 분승하 여 파리 주변에 산재한 혐의 대상자들의 거주지를 급습했다. 그러나 프랑스 에서는 6명 가량의 유학생들이 종적을 감추었다. 李基鐸 교수의 기억-.
 
 『코르베지 건축학교에 다니던 어느 유학생도, 그렇고 方俊(방준) 유학생 부부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프랑스에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朴俠(박협)은 실종됐던 李基陽 기자의 서울대 정치학과 2년 선배였습니다. 평소 대사관 에 나와 번역일도 했습니다. 일본의 유엔 대사의 조카딸과 동거하고 있었는 데, 이 친구 방을 급습해 보니 급히 개봉했던 편지 한 통만 있었습니다. 편 지 내용은 朴俠의 영문자 이름 略語인 P. H. 를 이용해 만든 암호전문이었 습니다.
 
 「Paul Heimat is seriouslly ill. And should be immediately hospitaliz ed in Paris.(폴 하이마트가 위독하다. 즉시 파리에서 입원시켜라)」朴俠에게 도피하라는 경고였는데, 박협은 이걸 받아 읽고 사라진 것이었지 요. 「입원」이란 의미는 모종의 비상통로를 찾아 잠적하란 의미였습니다. 朴俠을 포함한 프랑스에서 잠적했던 6명은 그 후 행방불명으로 처리됐지요 . 몇 개월 뒤 프랑스 경찰청은 駐佛 한국대사관측에 이들의 출국사실을 발 견할 수 없었다며 「KGB 계통으로 중국이나 소련 대사관을 통해 프랑스에서 빠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는 회신을 보내왔습니다』
 
 정보부는 혐의 대상자들을 본 공항을 통해 출국시키기 쉽지 않다고 판단, 함부르크까지 열 시간에 걸쳐 자동차로 이동, 한국과 수사협정이 체결되어 있는 일본항공(JAL)을 이용했다. 그러나 이미 국제법을 위반해 사태가 꼬 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한 교민은 자신의 집을 찾아온 정보부 요원을 따라 나섰다가 낌새가 이상하 자 도주해, 언론을 통해 이 사실을 폭로했다. 서독 언론은 처음엔 반응이 없다가 시간이 갈수록 한국인 실종신고가 늘어나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북한의 유언비어에 의해서인지, 혐의 대상자 중에서 허위사실을 발설했는지 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李修吉(당시 마인츠 대학 병원 방사선과 의사·現 7 3세) 박사 등 몇몇 무고한 사람들은 1967년 6월20일자로 駐西獨 한국 대사 관을 경유해 서울로 끌려온 경우였다.
 
 李修吉 박사는 1965년부터 한국 간호 사들의 독일 진출에 앞장섰고 선천성 기형 아동 34명을 한국일보를 통해 모 집하여 미국과 독일에서 무료로 치료받게 해 주는 등 韓獨 의료계 교류에 힘을 쏟았던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의사였다. 그는 또 1997년에는 뇌졸중으 로 쓰러진 崔炯佑 신한국당 고문의 치료를 맡았고, 이후 두 집안끼리 사돈 관계를 맺기도 했다.
 
 당시 정보부 수사관들은 서독 주재 한국대사관으로 李修吉 박사를 유인한 뒤 구금하고 강제로 「급히 서울에 가야 할 일이 생겼다」는 내용의 편지를 부인에게 남겨 두게 했다. 대사관측은 평소 부인과 안면이 있던 양두원 참 사관을 통해 「조용히 계시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부인 도 잠자코 있었다.
 
 7월3일, 프랑크푸르트 신문은 李修吉 박사를 포함한 5명의 한국인이 행방불 명되었다고 보도했다. 다음날엔 마인츠 신문과 라디오 방송까지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7월6일에는 마인츠 경찰서 수사과장이 형사와 함께 집을 찾아 왔다. 金炯旭 中情부장이 국내 언론을 통해 東伯林 사건을 발표 하기 전부터 벌어진 일들이었다.
 
 林錫珍 교수가 金炯旭을 만나 조사를 받기 시작한 5월 하순부터 6월 하순까 지 한국에서는 제7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고 선거 부정 시비로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이 기간중 金炯旭은 무슨 일을 하고 있었 을까. 그는 회고록을 통해 「나는 서독 현지에서의 말썽이 전파를 타고 한 국에 전해지기 전에 이 사건의 관련자로서 국내에 있던 혐의자들을 이미 구 속해 두고 있었다」고 쓰고 있다.
 
 1967년 7월8일 金炯旭은 기자회견을 통해 194명에 달하는 대규모 간첩사건 을 포착, 이 중 107명을 입건 또는 구속 수사중이라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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