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수사
서울 상대 출신인 詩人 千祥炳(천상병·1993 사망)은 마산 중학교 재학중 담임선생 金春洙(김춘수)의 권유로 詩를 써 靑馬 柳致環(청마 유치환)의 추 천을 받아 소년 등단했다. 가난했던 천재 千祥炳은 술을 친구처럼 벗삼은 기인이기도 했다. 서울대 재학시절 韓戊淑(한무숙) 선생 집에서 기숙할 때 , 대낮에 안방 화장대 앞에 놓여진 작은 洋酒병이 생각나 밤늦게 몰래 들고 나와 마셨더니 향수병이었다는 사건이 일화로 남아 있을 정도다.
그가 이 사건에 연루된 것은 상대 동기생 姜賓口(강빈구·당시 35·현 국내 거주)와 절친했기 때문이다. 姜賓口(국내거주)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유 학시절에 아내(姜하이디)와 東伯林에 들어가 金日成大 교수를 두 차례 만난 적이 있다』며 『그 일 때문에 애꿎은 친구만 죽도록 고생시켰다. 고문이 란, 당시로서는 자칫하면 당하는 일인 만큼 별 할 말이 없다』고 했다. 당 시 서울 상대 조교수를 근무하다 부인과 함께 구속된 그는 친구의 이름을 댄 적이 없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千祥炳이 잡혀와 있더라고 했다. 부유한 집안의 자제로 바이얼린 연주를 즐겼던 낭만주의자 姜賓口는 학창시 절부터 千祥炳과 단짝이었다. 유학을 다녀와서도 千祥炳을 불러 술을 사주 곤 했다.
수사관들에게는 「지하당 조직」으로 보였을 것이다. 東伯林 사건 관련 詩人 千祥炳의 공소장에는 죄목이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상의 불고지죄 및 형법상의 공갈죄」였다. 千祥炳은 6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었지만 행려병자가 되어 떠돌다가 세상 모르게 청량리 국립정신병 원에 강제입원되어 있었다. 文友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60여 편의 遺作 詩를 모아 遺稿(유고) 시집 「새」를 출간했다(1970년 12월). 살아 있는 사람을 두고 유고 시집이 나온 해프닝이 벌어진 것이다.
책이 나온 뒤 비로소 병원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친구들이 달려가 보니 千祥炳은 침대에 걸터앉아 아이같이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친구들을 맞았다.
그의 다리 사이에는 소변을 가리지 못해 채워진 커다란 기저귀가 있었다. 朴正熙 대통령을 만나 자수했던 林錫珍 교수는 수사만 받고 풀려났으나 그 의 친동생 林錫勳(당시 독일 유학중)은 15년 형을 확정 선고받고 1969년에 사면되어 서독으로 돌아갔다. 그는 지금까지 한국 국적을 버리지 않고 있 으며 처는 물론 자식들도 한국 국적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 기자와의 통화 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형님이 북한을 찾아 간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고 다녀온 뒤 태도를 바꾼 것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제가 북한에 연루된 것에 대해 원 망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를 문초했던 수사관들은 지식인들의 속성을 몰라 막무가내로 다루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들이 대한민국을 대표하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조국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東伯林 사건에서 등장한 혐의자 尹伊桑과 李應魯는 각각 독일과 프랑스에서 富와 명예를 누리며 살아갔지만 이들은 한국에 대해 냉정한 만큼 북한에 우호적이었다. 尹伊桑에 의해 인생의 곡절을 겪어야 했던 철학박사 林錫珍 의 경우 1979년에 가서야 겨우 그에 대한 출국금지조치가 해제되었다. 이후 독일을 오가며 국제 헤겔학회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어 뒤늦게 철학 계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현재 명지대 철학과 명예교수인 林錫珍이 1961년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 「헤겔의 노동의 개념」은 이미 세계헤겔학회에서 선정한 12권의 名著 중 하나로 뽑혀, 林錫珍을 하이데거, 루카치 등에 이은 세계적인 철학자의 반 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東伯林 사건 이후 국내에서 「배신자」 혹은 「이중 간첩」이란 비난을 받아가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꾸준히 학문에 몰입하여 지금까지 헤겔 저서 10권을 번역, 동양 최고의 헤겔 전문가란 평가와 함께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헤겔의 철학세계를 창조적으로 지향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4년 독일 유학생 부부 간첩으로 활동하다 자수한 韓秉勳씨는 林錫珍 교 수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사회가 무려 30년 이상 林錫珍 같은 학자를 깔아 뭉개고 尹伊桑, 宋斗律 같은 이들을 영웅시하게 됐습니다. 林교수야말로 세계적인 석학임에도 국내에서 그가 운영하는 헤겔 학회에 지원하는 재벌 기업은 하나도 없습니 다. 요샛말로 「왕따」를 당하면서 홀로 꿋꿋하게 학문에 정진하여 헤겔의 본고장에서까지 머리를 숙이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를 보는 눈이 멀었습니 다. 누가 우리의 눈을 멀게 했단 말입니까』
1967년 5월17일 林錫珍 교수의 자수로 시작된 「東伯林 사건」은 1970년 1 2월25일 크리스마스 특사로 모든 혐의자가 풀려남으로써 공식적으로는 종결 된 사건이었다. 내용면에서는 북한 對南공작 기관의 전술적 변화에 한국 정 보·수사기관이 재래식 간첩 수사 기법으로 대응하다 본질을 놓쳐버린 사건 이었다. 그 결과 정치적으로 국내 지식인 그룹을 反정부 성향으로 전환시킨 계기가 되었고 朴正熙 死後까지 한국 사회 깊숙이 북한의 지하당 공작이 개입하게 되는 여지를 남겨 놓았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