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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전날
 사형 전날
 
 대법원 전원 합의체가 10·26사건 피고인들에 대한 상고기각 판결을 내린 것은 1980년 5월20일이었다. 양병호 대법원판사 등 6명은 김재규 등 피고인들에게 적용한 '내란 목적의 살인죄'는 성립되지 않고 '단순 살인죄'로 봄이 타당하다는 소수의견을 냈다. 양병호는 '내란 목적의 살인이 되려면 상당히 넓은 범위의 모의와 조직, 다수에 의한 폭동 및 일정한 지역의 평온을 해치려는 계획 등이 있어야 하는데 이 사건은 김재규 혼자서 사전 모의 없이 그의 부하들을 지휘하여 저지른 범행이기 때문에 단순 살인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 사흘 뒤(23일)에 김재규는 남한산성의 군교도소에서 오전에 40분, 오후에 45분간 두 차례 가족들과 마지막 면회를 했다. 교도소에서 면회 중의 대화를 녹음하여 기록해놓은 자료가 있어 처형되기 하루 전 김재규의 심리상태를 짐작하게 한다. 오전에 면회 온 두 동서와 두 처남,그 리고 운전기사에게 김재규는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를 한다.
 
 '내가 죽거든 동정복에 중장 계급장을 붙여 입관해주고 검은 양말에 검은 구두를 신겨주고 오른 손에는 상아 지휘봉을 쥐어주되 내 약력은 창호지에 적어 관속에 넣어다오.' '내 예감에는 내가 물이 나는 곳에 묻힐 것 같은데…내 동지가 모두 일곱사람이니 나를 중심으로 내 좌우에 두 대령과 경비원을 각 두명씩 묻어다오. 내 옆에는 스페이스를 남겼다가 내 집사람이 죽으면 묻어라.' (김재규는 여섯 명의 사형수를 일곱 명으로 착각하고 있다.).
 
 김재규는 자신에 대한 사형집행이 민주화 운동을 촉발시킬 것이라고 예언한다.
 
 '내 시체는 집에 들이지 말고 병원에 안치시켰다가 장사를 지내라. 긴급조치 석방자, 복권자, 복학생들이 내 관을 메고 시가행진을 할 우려가 있으니 절대로 못하게 하라. 나의 사형집행이 이루어지면 나에 대한 국민감정이 돌아서서 민주화 운동이 확 일어날 것이다. 내 죽음이 결정적인 모멘텀이된다. 내가 간이 나빠 자연사를 하더라도 7∼8년밖에 못살 것이다. 후세 사람들에게 죽음의 시기를 잘 선택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 소련이라는 나라는 세계의 지붕으로서 여기서 빨간 물이 계속 해서 내려오니 민주화가 되든지 유신체제가 연장되든지간에 적화만은 막아야 한다.'.
 
 김재규는 또 '내가 아들이 없는 사람이니 민수(동생 김항규의 아들) 를 양자로 삼아 내 제사를 지내게 해다오'라고 당부했다. 그는 또 함께 저승으로 가게 될 부하들의 유족을 돌보아줄 것을 부탁한다.
 
 '수영이 엄마(처) 보고 가재도구까지 정리하여 한 사람에게 천만원씩 나누어주라고 하라. 동지들의 가족이 학교에 들어갈 때 찾아오면 기꺼이 등록금을 도와주도록 전하라. 합수부에 빼앗긴 내 재산을 찾는다고 소송 같은 것일랑 절대로 하지 마라.'.
 
 면회를 끝내고 돌아가는 가족들을 향해서 김재규는 '나에 대한 집행이 내일 오전 10시가 아닐까' 하는 뜻의 말을 일본어로 물었다. 가족들은 대답은 하지 않고 다음 주 화요일에 다시 면회를 오겠다고 했다. 김 재규는 이날 오전 8시 교도소장이 찾아왔을 때도 '문세광이도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난 다음날에 처형했는데 나에 대한 집행도 곧 있지 않겠느냐'고 말을 걸었다. 교도소장은 '내 권한 밖의 일이라 모르겠다'고 했다.
 
 이날 오후에는 김재규의 동생 김항규가 가족들을 데리고 와서 면회했다. 김재규 형제의 대화록을 읽으면 동생이 형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엿볼 수가 있다. 동생 김항규는 그때 건 설업체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는 사건 직후에 합수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회사를 국가에 헌납한다는 각서를 쓰고 나왔다.
 
 '제가 서빙고에서 풀려나오던 날에 전두환 장군이 시간을 할애해 주어 서빙고 특별실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전 장군이 이야기한 그대로 형님에게 전하겠습니다. 전 장군이 말하기를 '나는 선배로서 김 장군을 존경하지만 국가원수에 대한 일이니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고 합디다.' '나는 평소 전두환, 김복동, 노태우, 최성택을 친동생처럼 사랑했고 이 사람들이 빨리 커서 군의 핵심이 되어야 우리 군이 뿌리를 내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이곳에서 만 7개월간 갇혀 있으면서 전두환을 증오하게 되었다. 영혼이 되어서라도 복수를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지금도 전장군을 미워하십니까.' '그렇지 않다. 나는 작년 11월22일에 견성을 했다. 이제는 미운 것도 없고 좋은 것도 없다. 나는 대통령을 저격하는 순간 모든 것을 각오했다. 전두환에게 바라고 싶었던 것은 나도 일본무사처럼 자결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내가 왜 대통령을 죽이지 않으면 안되었느냐 하는 사실을 너희가 알아달라는 것이다.
 
 내 최후진술은 내가 조금도 사심 없이 내 마음을 기록해놓은 것이니 너희들도 한 부 씩 잘보관했다가 자손들에게 전하라. 내 마음이 움직였던 것은 유신헌법이 선포되는 날이었다. 집에서 세번이나 그것을 읽다가 하도 화가 나서 더러운 놈의 나라, 이게 무슨 헌법이야, 독재하자고 하는 짓이지, 하고서 고함을 치면서 책을 던졌더니 자고 있던 수영엄마가 놀라서 깨 더군.'.
 
 '그런 것은 신문에 다 보도가 되어 우리가 다 아는 일입니다. 이제 그런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대장부가 결심을 하고 행동을 하는데 7년이나 걸렸다. 내가 중정 부장이 되고 그렇게 기뻐한 것은 물리적인 방법이 아니고 대화를 통해서 대통령을 설득할 수 있겠구나 했기 때문이다.'.
 
 '형님이 사건을 일으키기 10일 전에 내가 형님을 방문했을 때 대통령께서 일본 비디오를 그렇게 좋아하시니 나 보고 일본에 가서 구해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후 나는 일 때문에 부산이다, 어디다 다녔는데 각하를 그렇게 생각하시던 형님이 변하셔서 각하를 죽였습니다. 형님은 저보고 동쪽으로 가라고 해놓고 서쪽으로 가셨습니다. 제가 전두환 장군의 그릇을 보니 쉽게 변하는 그런 분이 아닙디다.' '나는 개인적으로 당하는 박해 때문에 전두환에게 복수하려고 했다.'.
 
 '지금 생각은 어떻습니까.' '내가 한 일에 형벌이 가해지는 것은 자업자득이다. 다만 내가 불 안한 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잘 되지 않고 있는 점이다. 전두환 장군이 현재 어떤 지위에 있는지 모르지만 날 처형하려면 빨리 하고 설거지 할 것이 있으면 빨리 해서 자유민주주의가 안되어도 좋으니 정국의 혼 란을 빨리 잡으라는 것이다. 전두환이가 빨리 애국심을 발휘할 때가 지금이고 이때를 놓치면 천추의 한을 남길 것이다.
 
 내가 나온 사관학 교 출신들은 융통성이 없는 것이 단점이지만 빨리 정국을 안정시키는 길만이 전두환이가 사는 길이고 대한민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일이 다. 내가 언제 가더라도 울지 마라. 울 생각이 있으면 반야심경이나 외우도록 하라.'.
 
 김항규의 아들 민수는 김재규 밑으로 양자 입적을 하게 되었는데 이날 면회실 바닥에 거적을 깔아놓고 큰 절을 했다. 김재규는 민수를 끌어안고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 육군교도소의 수용자관찰보고서를 보면 김재규는 다음날인 24일 새벽 3시에 이감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초연한 자세로 이감을 실시하였으며 전야 수면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후 일체 취식을 거절하였음.' 김재규 사형장이 있는 서울구치소로 떠난 것은 이날 새벽 3시55분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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