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修吉 박사
독일 유학생 간첩으로 자수한 韓秉勳씨는 독일에서의 尹伊桑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민족주의자다」라 고 말하지요. 그럴 만도 할 겁니다. 그가 무슨 마르크스 철학을 알 것이며 계급혁명을 알겠습니까. 아무런 인문학적인 바탕이 없는 사람입니다. 단지 음악으로 명성을 얻은 것이 유럽 사회에서는 문화 권력가로 활동할 수 있 으니 북한이 이를 최대한 이용한 것이지요.
尹伊桑의 계보를 따라가면 송두율, 김용무 등 최근까지 한국 유학생들을 포 섭했던 학자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의 제자들이 국내 학교나 언론, 출판계에 서 자리를 잡고 있는 경우도 비일비재한 시대가 왔습니다. 서독에서 구축된 지하당 사건인 東伯林 사건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겁니다』東伯林 사건 혐의자 중 金玉姬(女)는 난수표를 소지하고 있다가 발각된 경 우에 속했다. 그는 프랑스에 유학중 북한 공작원에 포섭되었고 뒤에 朴鐘圭 청와대 경호실장 비서로 근무하다 이 사건으로 구속됐다. 1999년 9월19일 MBC텔레비전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끝나지 않은 東伯林 사건」에서 金玉姬의 남편 趙榮秀는 PD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난수표를 갖고 와서 그냥 묻어 두었다가 끝내 버렸다. 이용택 과장의 얘 기가 맞다』
李龍澤 당시 수사과장은 『그 난수표는 치마 밑에 숨겨 갖고 들어 왔던 겁 니다. 하지만 조사결과 한 번도 사용한 적은 없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林錫珍 교수에 의해 신고된 23명이 194명으로 확대되는 중에는 억울한 사람 들도 많이 끼어 있었다. 李修吉 박사는 1997년 자신의 회고록 「한강과 라 인강 위에 무지개 다리를 놓다(지식산업사)」를 통해 무고하게 연루되어 고 문받았던 과정을 일기체 형식으로 비교적 객관적으로 소상하게 밝혀 놓았다.
그가 겪은 고초는 뺨 때리기에서부터 물고문과 전기고문에 이르기까지 말로 만 듣던 고문들을 다 겪었다고 한다. 李修吉 박사는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 아 지팡이에 의지하며 살았던 1급 장애인 의사였다. 그가 남산 지하실에서 고문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수사관이 『언제 북한 대사관에 갔느냐』는 문 초에 『언제라고 쓸까요. 불러주시는 대로 쓰겠습니다』라고 했다가 『너같 이 지독한 간첩은 처음 본다』며 더 심한 고초를 겪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 정부와 독일 정부 사이에 架橋(가교)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의 비용을 대면서 시작한 간호원 派獨 사업은 북한이 자금을 대준 공작으로 오 인받아 없는 사실을 허위 자백해야 했다고 한다.
공작금 액수와 날짜를 대 야 하고 상대방과 접선 장소 등을 써야 했기 때문에 전후관계가 맞지 않으 면 다시 고문을 당하는 과정을 되풀이 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李修吉 박사는 독일정부측의 압력이 계속되는 가운데 수사결과 「무혐의」 로 밝혀져 20여일 만에 풀려났다. 당시 駐韓 독일 대사관의 페링 대사는 李修吉 박사를 대사관으로 불러 『독일에 돌아가서 조국을 비난한다는 것은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충고를 했다.
1967년 그는 7월20일, 한 달 만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해 공항 회견실 에서 서독 언론들과 기자회견을 했다.
<문:당신은 한국 정보 요원들한테 납치되어 갔는가? 답:나는 간첩 혐의를 받고 있다는 梁참사관의 말을 듣고 해명하기 위해 자 진해서 서울에 갔다.
문:한국 정부의 부정선거 때문에 국민들과 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을 무마하 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답:이런 질문의 답은 한국의 위정자들이 할 성질의 것이다. 한국 여론은 이 번 東伯林 사건의 적발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동시에 민첩한 수사활동에 만 족하고 있다. 만일 지금 이러한 사건을 적발하지 못하였으면 뒷날 많은 유 학생·간호원·광부들이 희생될 뻔하였다.(하략)>
李修吉 박사의 이런 회견은 물론 사실과 달랐다. 李박사는 그의 회고록에서 이런 소감문을 썼다.
「한국에서 받은 인간으로서는 당할 수 없는 고문과 치욕을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워서 침을 뱉으면 다시 자기 얼굴에 떨어진다 는 것을 생각할 때 독일 사람들 앞에서 나의 조국 한국을 헐뜯을 수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