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군부대 - 침투 그리고 노출
1968년 1월16일 朴正熙 대통령이 농림부, 건설부, 상공부를 연두순시하며 특용작물의 중점 지원, 서민 주택 건설에 주력하라고 각 부별로 지시를 하 던 시각, 金新朝 일당은 한국군 26사단 마크가 부착된 국군 복장에 개머리 판을 접을 수 있는 接鐵式(접철식) AK소총과 수류탄 및 對戰車(대전차) 수 류탄으로 무장하고 황해도 연산에 주둔한 부대를 출발했다. 이들은 자정 무렵 開城에 도착, 다음날인 17일 새벽 비무장지대內 최남단 초소가 있는 연천군 매현리에 도착하여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이들은 이곳 에서 야간 침투를 위한 僞裝(위장)을 했다.
이날 국방부는 「原州 회의」에서 朴대통령이 내린 특별지시에 따라 분산된 對간첩 작전을 일원화시키는 새 기구안을 마련해 국무회의에 상정했다. 새 기구안은 대통령 직속으로 對간첩작전을 총지휘하며, 정책을 마련하는 중 앙협의회와 정책을 실천하는 대책본부를 두고 대책본부는 합동참모본부에 설치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1월17일 밤 8시, 무장공비들은 美 2사단 지역의 正面(정면)을 향해 포복으 로 접근하기 시작, 10시 정각에 철조망이 가설된 철책선에 도착했다. 이들 은 절단기로 철조망을 제거하고 휴전선을 넘어 은밀 침투를 시작했다. 124군 부대 무장공비들은 軍 GP들이 요소 요소에 있는 휴전선 남방한계선부 터 임진강을 건너기까지는 속도를 내지 못했다. 은밀 침투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는 물론 숨소리나 냄새까지 죽이며 지형의 그늘진 부분을 이용해 이동 하는 特殊戰(특수전) 기술이다. 초소나 경비병 근처에서는 땅에 납작하게 붙어 한 시간에 수 m 정도만을 이동할 정도로 인내력과 지구력이 요구된다 . 金新朝를 포함한 무장공비들은 이미 훈련과정에서 이런 능력을 배양했고 , 야간 침투중 인기척을 느꼈을 경우 부동자세로 한 시간 동안 버티는 훈련 까지 받았다고 한다. 어둠속에서 상대방이 이 쪽을 사람으로 인식하지 못하 게 하는 훈련이었다.
이들은 美 2사단 구역을 통과하여 고랑포에서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널 때까 지 약 10km의 구간을 엎드리고, 기고, 달리고, 숨고 하며 먼동이 틀 때엔 임진강을 건너 경기도 파주군과 법원리 사이의 작은 산 기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경비병이나 지뢰밭을 만난 적도 없었다.
이들이 선택한 침투로는 임진강과 휴전선이 가장 근접한 지역일 뿐 아니라 얼어붙은 임진강을 도강할 수 있는 특별한 지역이었다. 서해바다로 연결된 임진강의 중·하류가 시작되는 임진각 부근은 海水가 滿潮(만조)때마다 밀 려 올라와 얼음이 비늘처럼 솟아오르고, 얼지 않은 바닷물이 곳곳에 고여 있어 도보로 건널 수가 없는 곳이었다. 대신 고랑포 지역은 상류에 속해 海水의 영향이 없고 겨울에는 단단하게 얼어 있어 이들이 침투로로 선정할 수 밖에 없었다.
휴전선에서 고랑포에 이르는 루트가 美軍이 관할하는 지역이란 점도 고려되 었다. 미군 지역에서는 무장침투 간첩을 한국군으로 誤認(오인)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미군 지역 철책이 舊型(구형) 철조망이었기 때 문이었다. 金聖恩 당시 국방장관의 증언.
『1967년은 유달리 남침 사례가 많아 휴전선 철책부터 보강하기로 했습니다 . 그때까지 휴전선 철책이란 휴전 당시 남북한 군인들이 직접 설치한 원형 철조망 서너 가닥이 전부였습니다. 새빨갛게 녹이 슬대로 슬었고, 가끔씩 보수공사를 한다고 갈아주기는 했지만 인적이 드문 비무장지대에다 예산부 족으로 改修할 생각을 못했지요. 이것을 美 국방성에 부탁해 자재를 공급받 아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철책선을 만든 겁니다. 이 공사는 그 해 겨울, 2 49km의 휴전선 全지역에서 완성을 보았습니다. 단 미군 지역 4km 정도만 제 외되었지요』
美 2사단측은 鐵柱(철주)를 박고 전기 철조망을 쳐 對敵하려는 한국군의 대 응자세를 못 미더워하면서 자신들이 보유한 전자 감응 경보기 등으로 대처 하겠노라며 공사를 거부하고 있었다.
1968년 1월18일 오전 5시, 은밀침투로 법원리 뒷산에 도착한 31명의 무장공 비들은 지쳐 있어 이날 밤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공비들은 假眠(가면)상태 로 휴식하고 있었고 5명이 교대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해 들어온 시각에 朴正熙 대통령은 연두순시에 여념이 없었다. 1월18일에는 외무부, 문교부, 공보부 에 들러 1968년도 시정방침에 관한 보고를 들었다.
1월19일, 與野 총무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국회가 2월 중순까지 空轉(공전) 이 확실시 되는 가운데 朴正熙 대통령은 법무 국무 교통 등 3개 부처를 순 시했다. 그는 국군장병의 처우개선, 호남선 複線化(복선화)계획 촉진 및 호 남지방 고속도로 계획을 수립할 것을 관계부처에 지시하고 있었다. 이때가 오후 2시경.
바로 그 시각, 파주군 초리골에 살던 禹聖濟(우성제·현 파주경찰서 보안계 장)를 포함한 네 형제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벼랑 아래에 숨어 있던 공비들의 경계병과 마주쳤다.
『국군 대위 한 명, 소위 한 명, 그리고 사병 계급장을 단 3명 등 모두 5명 이었죠. 우리 국군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신발은 검은 농구화였고 총은 개 머리판을 접을 수 있는 AK소총이었어요. 한 눈에 공비라고 알아 보았지만 도망가기엔 너무 때가 늦었습니다』
禹씨 형제를 본 공비들은 태연을 가장하고 불러 세워 담배를 권하더니 갑자 기 기관총으로 등을 밀며 벼랑 쪽으로 몰았다. 禹씨 형제들이 벼랑 밑으로 와 보니 일개 소대 병력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겁을 집어먹은 禹씨 형제들에게 『너, 우리가 어떤 사람들 같아?』라고 물 었다. 『군인 같은데요』라고 하자 공비들 중 한 명이 『우린 혁명당이야』 라며 참깨 섞인 엿과 오징어를 주고 말을 붙였다.
『너 쌀밥 일년에 얼마나 먹어봤어?』
『밥은 하루에 세 번 먹잖아요』
『……』
31명의 공비들은 禹씨 형제들에게 지서의 위치와 문산 동두천 의정부로 가 는 방향을 묻기도 하는 등 이런 저런 말을 붙여왔다. 金新朝(現 충남 예산 군 성결교회) 목사의 증언.
『원칙으로는 작전 도중 만나는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무조건 죽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대원들 중 일부가 「죽이면 오히려 문제가 생기지 않겠냐」며 반대를 했습니다. 투표를 했는데 역시 살려두자는 의견이 많았 습니다』
禹씨 형제는 벼랑 아래 덤불 속에서 네 시간여 동안 공비들에 둘러싸여 있 으면서 말 상대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뒤에야 풀 려날 수 있었다. 공비들 중엔 호주머니 속에 넣어 둔 손목시계를 꺼내 선물 로 주며 『만약 비밀을 지키지 않고 경찰에 신고하면 우리 후속 부대가 내 려와서 너희 마을과 가족들을 몰살시켜 버릴거야』라고 위협했다. 禹씨 형제들은 빈 지게를 지고 돌아 나오면서 자꾸만 뒤가 꺼림칙했다고 한다.
『혹시 쏘지나 않을까 겁이 났지요. 우리가 한참 걸어 나오다가 힐끗 돌아 보니 깜깜한 데 뭔가 움직임이 느껴졌어요. 이동중이란 걸 알았습니다』 형제들은 마을 입구 가로등 밑에서 미행이 없는지 살핀 뒤 언제 신고를 하 느냐를 놓고 고민했다고 한다. 이들은 丹陽 禹씨 종가집으로 달려가 어른들 과 함께 파주군 법원리 창현파출소에 신고를 했다. 이때가 1월19일 밤 9시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