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늦은 防禦線 구축
1968년 1월20일 토요일 오전 朴正熙 대통령은 청와대 주변의 병력배치 상황 을 보기 위해 金聖恩 장관과 朴鐘圭 경호실장을 대동하고 청와대 정문까지 내려왔다. 이틀 후 월남을 방문하기 위해 전날 청와대에 들러 朴대통령에 게 보고차 인사를 했던 崔宇根(최우근·육사3기) 수경사 사령관이 청와대로 달려왔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양복 차림의 朴대통령이 정문에 서서 수경사 30대 대 병력들이 배치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오후부터 朴대통 령은 감기를 앓아야 했다. 崔사령관의 인사를 받은 朴대통령의 얼굴엔 긴장 감 같은 것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곁에 섰던 朴鐘圭 경호실장이 『정보부 장보다 빨리 오네?』하며 농담을 했다.
오후 2시경, 6군단 예하 3개 사단과 金載圭(김재규) 중장의 6관구 병력이 동원되어 전방에서부터 서울 외곽에 이르는 수십 겹의 방어선이 구축됐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장공비들이 이미 통과한 다음 병력을 배치한 것이었다 . 공비들은 자신들이 놓아준 禹씨 형제들의 신고보다 빨리 포위망을 벗어난 셈이었다.
이날 청와대에서 金聖恩 장관은 李世鎬 6군단장에게 『주간에는 정밀 수색 을 실시해 흔적을 찾고 야간에는 매복을 하라』고 지시했다. 朴대통령은 金聖恩 장관과 점심을 함께 들며 『임진강이 겨울에도 얼지 않으면 좋을 텐데 말이오』라며 아쉬워 했다.
金장관은 오후 2시경, 수색대로부터 보고를 접했다. 받아 보니 북한산 북쪽 자락의 경기도 송추 유원지 부근에서 무장공비들의 것으로 보이는 실탄과 탄창 및 흘린 듯한 음식물 약간이 발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설마 거기까지 들어왔을까, 하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철통 같 은 방어선을 펼쳤는데 하루 만에 그 지역을 통과하면서 유실물 흔적을 남겨 두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朴대통령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보분석을 함께 하고 있었지요』
이때 金聖恩 장관은 결과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결정을 내렸다.
『미심쩍은 구석이 있어 대통령 집무실에서 전화로 蔡元植(채원식) 치안국 장을 불러냈습니다. 그리고 서울 지역에 甲種 비상을 걸도록 하고 세검정에 서 정릉과 창동에 이르는 축선에 경찰 병력을 배치하라고 지시했습니다』 1월6일 「原州회의」에서 결정된 비상 경계령을 처음 적용한 것이었다. 甲種 경계령이 내려진 서울에서는 경찰들이 비상 근무에 들어갔다. 이무렵 무 장간첩들은 북한산 僧伽寺 아래 기슭에 모여 휴식에 들어갔다. 계획대로라 면 이날 오후에는 청와대 뒷산인 北岳山까지 가 있어야 했다. 金新朝 목사 의 증언.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4일 동안 강행군했기 때문에 지쳐버렸던 것이죠. 원래 루트는 다음날인 21일 오후까지 북악산을 지나 밤 8시경에는 세검정 쪽으로 빠져 나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북악산을 타려면 공격시간에 제대로 도착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허리까지 눈이 쑥쑥 빠지고 발밑은 미끄럽 고 더 이상 산을 타는 것은 무리였다고 판단해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이들은 마지막 남은 산 하나를 둔 채 휴식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날 碑峰 에서 세검정 쪽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날 밤 金聖恩 국방부장관 은 저녁 늦게까지 朴대통령과 환담했다.
朴대통령은 감기가 조금 심해지는 듯 밤이 깊을수록 기침을 자주 했다고 한 다. 金장관은 자정이 다 되어서야 한남동 공관으로 돌아왔다. 1월21일 일요일 오전, 金聖恩 국방장관은 청와대로 곧바로 출근해 任忠植 합참본부장과 함께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朴대통령은 지도를 펴 놓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金炯旭 정보부장이 드나들었지만 對간첩 작전 권이 국방부로 이첩되고 사건 성질상 자신이 개입할 만한 것이 아니어서 별 말이 없었다는 것이 金聖恩 前 국방장관의 증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