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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속 10㎞의 중무장 산악 질주
 시속 10㎞의 중무장 산악 질주
 
 국가간의 전투력은 戰場에서 비로소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1·21 사태는 6·25 이후 15년 만에 남북한 전투력을 비교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金新朝를 포함한 중무장한 인민군 1개 소대병력은 휴전선을 넘어 임진강을 건널 때까지 국군 초계병들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나뭇군 禹씨 형제와 우연히 부딪친 것을 제외하면 前方 거주 주민들에게 거동수상자들로 몰려 신고된 적도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對간첩 작전능력도 6·25 이후 별로 改善된 적이 없는 상태였다. 통신 계통은 특히 전근대적이었다.
 金新朝와 30명의 무장공비 목격 사건은 禹씨 4형제에 의해 1월19일 밤 9시 경 파출소에 신고 접수가 되었지만, 인근 군부대에 전달된 시각은 9시30분 경이었다. 對간첩작전 대책본부가 설치될 합동참모본부에는 세 시간이 지난 자정무렵에 이 정보가 도착했다.
 
 金新朝 목사의 회고.
 
 『자만심 같은 게 있었어요. 훈련을 받을 때 모래주머니를 차고 산악구보를 매일같이 하면서 교관들은 우리에게 「동무들은 세계 최강의 용사다. 국방 군들이 동무들 을 비행기로도 못 쫓아 오게 만들어 주겠다」며 혹독한 훈련 을 시켰거든요』
 
 1월19일 오후 8시경 禹씨 형제들을 살려 보낸 뒤 거의 동시에 金新朝 일당 은 법원리 뒷산을 출발, 서울을 향해 급속 산악행군을 시작했다. 급속행군 이란, 약 30㎏의 짐을 진 重무장한 군인이 시간당 10km를 주파하는 구보이 다. 당시 한국군의 경우 급속행군은 산악이 아닌 오직 도로 위에서만 가능 하다고 믿고 있었다. 한국군의 군사적 상식으로는 야간 산악행군일 경우 시 간당 4㎞를 넘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金新朝 일당은 시간당 평균 10 ㎞씩 주파하면서 법원리-미타산-앵무봉-노고산-진관사-북한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달리고 있었다.
 
 비슷한 시각, 중앙정보부 康仁德 과장은 이날도 자신의 분석이 들어맞지 않 아 실망한 채 관사로 퇴근하여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 머리 속은 온통 북한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1월20일 토요일 새벽 두 시 경, 전화 벨 소리에 선잠에 빠졌던 康과장이 전화를 받았다.
 
 『예, 강인덕 과장입니다』
 
 
 『과장님, 새까맣게 들어왔습니다』
 
 『몇 명이나 돼?』
 
 
 『잘 모르겠지만 30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康仁德 과장은 「게릴라전이 시작됐다. 이젠 정치가 아닌 군사력이 대응해 야 할 때」라고 생각하며 출근 준비를 했다. 이때 金新朝 일당은 앵무봉을 지나 경기도 구파발 부근의 노고산 능선을 타고 있었다. 새벽 4시경엔 노 고산을 주파한 뒤 서울의 경계선이자 북한산으로 접어드는 길목인 眞寬寺( 진관사)를 통과했다. 오전 6시경엔 북한산 碑峰(비봉)에 도착했다. 10시간 동안 거의 휴식없이 全力질주를 해낸 것이다.
 
 1월20일 토요일 오전 9시, 金聖恩 국방부 장관은 청사로 출근해서야 이 사 실을 보고받았다. 오전 9시30분경, 金장관은 차를 타고 청와대로 들어가 朴正熙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朴正熙는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어 디로 들어왔소?』라고 물었다.
 
 
 『임진강 상류 고랑포 쪽입니다. 얼음이 얼면 건널 수가 있는 곳이지요』
 
 『그놈들이 뭣하러 들어왔을까?』
 
 
 『각하, 지난해 놈들은 이미 우리나라의 각종 기간 시설을 파괴하는 활동을 해 오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주한미군의 주둔지 시설 파괴나 테러일 가 능성이 큽니다. 한국군 부대나 주요시설도 목표가 될 것 같습니다』 휴전 후 연간 最多 도발 횟수인 170회를 기록한 1967년 한해 동안 전방지역 에서는 전쟁에 준하는 북한의 군사도발이 한국군과 주한미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감행됐다.
 
 1월19일에는 동해 휴전선 근해에서 순찰중이던 한국 해군 56함 당진호가 두 척의 북한 砲艦(포함)으로부터 피격받아 침몰했고, 4월12일에는 중부산악 지대 휴전선을 북한군 90여명이 침범해 들어와 국군 7사단과 교전을 했다. 이때 7사단의 3개 포병대대가 북한지역에 휴전 후 최초로 585발의 포격을 가하기도 했다.
 
 4월22일에는 북한군들이 서부전선으로 침투해 미군 막사를 폭파, 두 명의 미군이 숨지고 19명이 부상하는 사건도 있었고 5월27일에는 북한 경비정이 연평도 근해에서 작업중이던 한국 어선단에 포격을 가해 한국 해군이 25분 간 엄호사격을 하기도 했다.
 
 8월7일에는 침투한 북한군이 판문점 남방 대성동 자유의 마을 앞에서 미군 트럭을 습격해 3명의 미군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했다.
 
 사흘 뒤엔 서부전선에서 한국군 트럭이 습격당해 아군 3명이 사망했다. 8월 28일, 북한군은 판문점 동남쪽 30여m에 위치한 미군 막사를 기습, 미군 3명 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했다.
 
 9월5일에는 경원선 열차 폭파사건이, 13일에는 경의선 열차 폭파사건이 있 었고 동해상에서 조업중이던 어선을 여러 차례 납치하는 등 진행속도가 완 만할 뿐 전쟁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朴正熙 대통령에게 보고하던 金聖恩 국방장관은 그 순간까지도 침투한 무장 공비들이 지난해와 유사한 작전을 펼칠 것으로 짐작했을 뿐 청와대가 목표 인 것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이날 오전 金聖恩 장관은 李世鎬 6군단장을 전화로 불러내 예비사단까지 동원해서 서울 외곽에 집중 배치토록 지시했다. 6·25 당시 해병 전투단장(여단장)으로 한국군 1사단 지역이던 문산 지역에 서 美 해병대와 연합작전을 수행했던 金聖恩 장관은 金新朝 일당이 침투해 들어오는 해당 지역의 지리를 손바닥 보듯이 꿰고 있었다. 金 前 장관은 당시 자신의 추론이 어긋나 있었음을 시인하면서 이렇게 회고했다.
 
 『金新朝 일당이 나무꾼들을 풀어 준 지점에서 서울 眞寬外桐(진관외동)의 眞寬寺(진관사)까지 산악 코스로 행군을 하면 해병대도 이틀은 족히 걸리 는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眞寬寺를 거쳐 北漢山 碑峰의 僧伽寺 (승가사) 아래까지 도착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 기겁했지요. 중무장 하고 야간 산악행군으로 북한산까지 올 수 있다는 건 제 군대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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