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준비에 돌입!
金新朝가 체포된 곳은 자하문 밖 인왕산 기슭에서였다. 1월22일 새벽 1시 30분경, 자하문 밖 세검정 부근에서 잠복 근무를 하던 30사단 공병대 소속 車章錫 이병은 세검천 위쪽 인왕산 기슭에서 계곡 쪽으로 살금살금 기어내 려오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M1소총 자물쇠를 푼 車이병은 검은 그림자를 조 준하려 애썼다. 야간사격은 총열 끝에 붙은 가늠쇠도 잘 보이지 않아 빗나 가기 일쑤다. 車이병의 사격도 빗나갔다. 괴한은 세검천 변 외딴 집 옆에 있는 바위로 몸을 숨겼다. 두 시간 반 전에 경복고등학교 담장을 넘어 도망 쳤던 인민군 소위 金新朝였다.
『한 놈 나타났다!』 소대장 朴源造(박원조) 소위와 소대원들이 달려 와 포위망을 쳤다. 朴소위 가 플래시로 바위 쪽을 비춰보니 짚단 더미 사이로 사람 그림자 비슷한 것 을 보았다. 수하를 위한 암구호를 외쳤다.
『피아노』
『……』
『피아노』
『……』 대꾸가 없자 병사들이 바위 주변에 위협사격을 가했다. 순찰중이던 周喜俊 (주희준) 소령이 트럭을 끌고 와 헤드라이트로 괴한이 숨은 바위 주변을 환 하게 밝혔다. 괴한은 그때서야 짚더미를 헤치고 어정쩡하게 두 손을 들고 일어났다.
『두 손을 높이 들어! 안 그러면 쏜다!』 괴한은 주먹쥔 왼손 안에 가지고 있던 수류탄을 땅에 떨어뜨렸다. 안전핀이 빠진 채 땅바닥을 구르던 수류탄은 군인들과 괴한을 초긴장 속으로 몰았다 . 그런데 몇 초가 지나도 수류탄이 터지지 않았다. 불발탄임을 감지한 한 병사가 뛰어나가 수류탄을 차 버리고 괴한을 생포했다. 현장에서 몸수색을 한 결과 괴한의 소지품이 쏟아져 나왔다. 참깨 섞은 엿 두 개, 말린 오징 어 한 마리, 아스피린, 소화제, 페니실린, 각성제 등의 약품과 30cm짜리 파 이프를 가지고 있었다. 물이나 흙 속에 몸을 은폐할 때 숨을 쉬기 위한 호 흡용 파이프였다.
나머지 공비들 중 일부는 세검정 부근 民家 쪽으로 튀었다. 21일 밤 11시경 홍제동 쪽으로 달아나던 공비 한 명은 지붕을 타고 도망가다 지붕이 내려 앉아 그 집 부엌으로 떨어졌다. 잠을 자던 李翔來(이상래·당시 65세)씨와 아들 容瑄(용선·당시 31세)씨 등 가족 5명이 『도둑이야』라고 소리치며 뛰어나가 몽둥이로 괴한에 달려 들었다. 이들이 괴한과 몸싸움을 하던 도 중 괴한의 몸에서 수류탄이 떨어져 나와 가족들은 비로소 무장공비임을 알 게 됐다.
李씨 가족 중 한명이 30여m 떨어진 홍제동 파출소에 신고했으나 경찰이 늑 장 출동을 하는 바람에 공비와 격투를 벌이던 아들 容瑄씨는 공비가 쏜 권 총에 복부를 맞아 숨졌다. 신고를 받고도 즉시 출동하지 않은 홍제동 파출 소장은 며칠 뒤 파면되었다.
자하문 경복고등학교 후문 부근에서 첫 교전을 벌이고 학교 담을 뛰어넘은 공비는 金新朝뿐 아니라 5명 가량이 더 있었다. 이들은 몰려 다니며 교장 사택으로 뛰어 들어 마당에 수류탄을 던지는 바람에 집안의 유리창이 박살 났다. 폭음소리에 놀라 달려 나온 수위 鄭四永(정사영·당시 45세)씨에게 수류탄을 던져 살해했다.
밤 11시30분 경에는 홍제동 파출소 앞 버스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여 자가 유탄에 맞아 숨지는 등 이날 밤 우리측은 崔圭植 서장과 민간인 6명 등 모두 7명이 사망했고, 朴泰安 형사 등 3명의 경찰관과 민간인 한 명이 부상했다. 공비를 쫓던 수경사 30대대는 22일 오전 8시경 北岳山에서 3명, 오전 11시쯤 다시 한 명의 공비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로써 22일 오전까지 첫 교전에서 金春植을 포함한 다섯명의 공비를 사살하고 한 명(金新朝)을 생포했다.
1월23일 오후 1시쯤 북한산에서 한 명의 공비가 사살된 이후 공비들은 서울 외곽으로 완전히 빠져 나갔다. 이 무렵 생포된 金新朝를 심문했던 방첩대 에서는 「124군 부대」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金新朝에게 북한 전역에 걸 친 부대 위치와 金新朝 자신이 훈련받은 부대의 위치 및 건물 요도를 그리 게 했다. 金聖恩 당시 국방장관은 이 그림을 들고 본스틸 유엔군 사령관을 만났다. 첩보기를 띄워 항공 촬영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金 前 장관의 증언.
『오산 비행장에서 첩보기 SR-71이 이륙하더니 서해안에서 곧바로 北上하다 가 평양 부근에 이르러 우회전하더군요. 그리고 원산까지 통과하는 데 정확 히 3분이 걸립디다. 이렇게 해서 얻은 항공사진으로 김신조가 그린 건물과 비교를 해 봤는데 정확했습니다』
방첩대의 조사와는 별도로 공비 소탕에 나선 군경합동 수색대는 1월30일까 지 31명의 공비 중 27명을 사살하고(자폭 포함) 金新朝 한 명을 생포했으나 우리측도 민간인 7명이 사망했고, 이익수 대령 이하 23명의 장병이 전사했 으며 부상자만도 52명이나 되는 등 큰 피해를 보았다. 행방이 묘연해 진 공 비 세 명 중 한 명은 2월 중순 경기도 양주군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고 나머 지 두 명은 월북한 것으로 판단해 작전을 종결지었다.
북한의 冬季 침투 작전이 청와대 앞에서 좌절된 다음날인 1월22일 오후에는 한반도를 또 다른 긴장 속으로 몰아 넣는 사건이 터졌다. 북한은 원산 앞 공해상에서 전파 감청활동을 하던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號를 4척의 무장 초계정과 2대의 미그 전투기를 동원해 원산항으로 납치하는 데 성공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1·21 사태의 위기국면을 극복하고 반격을 가하려던 한국의 입장 을 잠시 유보시켰다. 공동의 피해자가 생겼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1월23일 미국은 일본에서 월남으로 남진하던 핵 추진 항공모함 엔터프라이 즈호와 3척의 구축함을 동해로 회항시켜 원산만에 대기토록 명령했다. 1월 24일 딘 러스크 美국무장관은 상원외교위원회에서 『일종의 전쟁행위로 규 정지을 수 있다』고 발언했다.
이날 본스틸 유엔군 사령관 겸 주한미군 사령관은 金聖恩 국방장관을 만나 이런 요지의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우리 미국은 이번엔 가만 안 있겠다. 지금까지 북한이 한국에서 숱한 도 발을 해 오고 우리 미군도 피해를 보았지만 지금같은 경우는 참을 수 없다 . 이것은 미국의 방침인데, 원산항을 포함한 몇 개의 군사시설에 폭격을 가 할 계획이다』
金국방장관은 한편으로는 기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全面戰(전면전)이 일어 날 가능성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미국은 월남전에 깊이 개입해 있었고 힘겨워 했습니다. 과연 미국이 월남전과 한국전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을까를 먼저 따져봐야 했지요』 이날 오후 金聖恩 국방장관은 청와대로 들어가 朴正熙 대통령에게 이 같은 사실을 전했다. 귀를 기울이고 듣던 朴正熙는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아! 기분 좋-다. 이거 한번 때려 부셔야 한다. 좋-다. 金장관, 우리도 준 비합시다』
전군에 비상이 걸렸다. 휴가군인들은 즉시 부대로 歸隊(귀대)하라는 방송이 나갔고 營外(영외) 거주자들은 營內(영내) 대기를 했다. 軍 행정사무실과 여타 근무지에서도 즉시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완전군장을 상시 비치하도 록 했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