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배신
미국 정부가 부딪친 장애물이 있었다. 미국 이 북한을 공습할 경우, 미국은 월남 반도 와 한반도에서 두 개의 전쟁을 수행할 수밖 에 없다는 현실이었다. 1961년 7월에 각각 체결된 북한-소련 상호원조조약과 북한-중 국 상호방위조약도 미국의 발목을 잡았다. 이 두 조약은 「체결국 一方이 무력 침공 을 받을 때 他方은 지체없이 군사 또는 그 밖의 수단으로 원조한다」는 조항을 두고 있었다.
朴正熙 대통령도 미국의 이런 입장을 염려 했다. 1968년 1월27일 金聖恩 국방장관과 점심을 함께 하며 朴대통령은 『미국이 과 연 월남전을 치르면서 북한도 때릴 수 있을 까?』하고 궁금해 했다고 한다. 한국 수뇌부는 全軍에 비상대기를 발령해 놓고 砲兵도 前方으로 추진완료 했다. 영외 거주 장교와 하사관들은 영내대기 상 태로 출동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朴대 통령은 수시로 金聖恩 국방장관을 전화로 불러내 상황을 알아보곤 했다. 미국의 북한 공습은 차일 피일 연기되기 시작했다.
金聖恩 국방장관은 더욱 초조했다. 미국은 소련에 북한과의 협상중재 요청을 했다가 거절당하자 폴란드 정부에 중재를 요청하고 있었다. 1월27일, 북한 代理대사 가 폴란드 외무성을 방문한 뒤 폴란드 주재 미국 대사가 외무성을 방문했다. 이날 오 후 3시부터 4시 반까지 청와대에서는 朴대 통령이 주재하는 時局대책회의가 전날에 이 어 계속해서 열렸다.
미국의 방향선회를 암시하는 조짐은 다음날 인 1월28일 일요일 오후에 外信을 통해 흘 러나왔다. 外信은 「북한은 푸에블로號와 북한 게릴라들을 교환할 것을 암시했다」고 보도했다. 비상대기중이던 崔圭夏 외무장 관과 국장들이 긴급 회의를 열고 「어불성 설」이란 반박 성명을 내기로 결정했다. 외무부 대변인은 『침략자(북괴 유격대)와 공해상을 항해하다 불법 납치된 피해자(푸 에블로號)를 교환한다는 것은 침략을 감추 려는 북괴의 잔꾀』라고 설명했다. 外交街 에서는 『북한이 「교환」 제의를 한 底意 는 미국과 직접 교섭의 先例를 남겨 국제적 인 지위를 얻어보자는 것』이라는 풀이가 돌고 있었다.
1월29일 오전, 미국의 백악관 대변인 조지 크리스천은 『푸에블로號 위기를 평화적으 로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미국이 벌이고 있 는 외교 채널은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날 오후 미국의 백악관 대변인은 『北韓 이 나포한 푸에블로號 및 승무원의 억류를 계속 고집하지 않는다면 北韓과 한국 문제 전반에 걸쳐 토의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 했다. 비슷한 시각, 포터 주한 美 대사가 청와대를 예방하고 朴正熙 대통령에게 미국 정부의 이같은 입장을 설명했다. 국방장관 金聖恩씨의 증언에 따르면 이날 포터 대사를 접견한 朴正熙 대통령은 몹시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韓美 공조 동맹이니 뭐니 해왔지만 미국 은 자기 이익만 견주고 마음대로 정책을 바 꾸기도 하는거요? 북한이 그렇게 무섭다면 우리가 직접 북한을 공격하겠소』 포터 대사는 朴대통령의 강력한 결전의지를 확인한 듯 서둘러 청와대를 빠져 나갔다고 한다. 그 직후 金聖恩 장관과 朴대통령은 미국에 대한 배신감에 허탈해 했다는 것이다. 포터 대사가 다녀 간 뒤 朴正熙 대통령은 朱源(주원) 건설부 장관과 安京模(안경모) 고속도로 계획조사단장으로부터 경부고속 도로 건설 실천계획을 보고받았다. 시공업 자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태국에서 고속도로 공사를 해 본 現代건설이 수의 계약에 의 해 결정되었고 서울-수원간 32km를 시범적 으로 공사키로 결정했다. 조사단의 계획안 은 朴대통령이 제시한 공정 계획표에 따라 2월1일에 起工, 총 예산 330억원을 들여 1970년 말에 京釜간 공사를 완공하키로 되 었다.
朴대통령이 고속도로 계획 조사단에 제시한 고속도로 공정계획표는 金新朝 일당이 청 와대를 기습한 다음날인 1월22일 직접 작성 한 것으로 침투한 무장공비들 중 일부가 아 직 청와대 뒤 북악산과 북한산에 남아 아군 과 총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당시 상 공부 제1공업국장이던 吳源哲씨는 『朴대통 령의 고속도로 건설 집념은 산업 건설뿐 아 니라 군사적인 목적도 염두에 둔 것』이라 고 설명했다.
『現代戰은 기동전이기도 합니다. 서독의 고속도로 아우토반은 히틀러의 전격전에 대 비한 전략 도로였다는 점을 朴대통령은 잘 알고 있었고, 우리도 북한의 무장공비가 출몰할 때 신속히 부대를 투입하기 위한 도 로확보에 朴대통령은 늘 아쉬워 하고 있었 습니다』
金聖恩 前 장관의 회고.
『청와대 밖에서 총소리가 아직도 나고 있 는데 집무실에 앉아 3년 후에 완공시킬 고 속도로 공정표를 구상할 수 있는 지도자가 바로 朴正熙 대통령이었습니다. 軍人으로 서 전쟁을 수행한 경험과 사범학교를 거친 모범적인 교사의 경험이 몸에 밴 朴대통령 을 모시던 저는 꼭 忠武公 李舜臣 장군을 보는 듯했으니까요』
청와대 정무비서관, 통일원 차관을 지낸 董勳씨는 이런 회고담을 털어 놓았다.
『이무렵 朴대통령은 경제 건설을 至上 至高로 생각하고 있었고 이 속도를 저해하는 어떠한 일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자세였습 니다. 언젠가 제게 「金新朝가 오건 朴新朝 가 오건 경제건설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고 말씀 하신 적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