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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正 공세
 舊正 공세
 
 1968년 1월21일부터 1월30일까지 열흘은 자 유진영 對 공산진영 간 세력균형의 大地震 이 일어난 시기였다. 한국에서 벌어진 1· 21사태에 이은 1월22일의 푸에블로號 납치 사건을 맞은 미국은 군사적 대응조치에 한 계를 느꼈을 뿐 아니라 越南戰도 더 이상 확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1월29일 오후 미국 정부는 메크로스키 국무성 대변인을 통해 『미국은 현재 수준으로 越盟軍의 침 투를 저지하면서 北爆을 중지하고, 평화회 담을 할 의향이 있다』고 발표했다. 1월30일 새벽에는 월맹군과 베트콩에 의한 월남전 최대규모의 기습 공격이 월남 전역 에 걸쳐 시작되었다.
 
 이른바 「테트(Tet·舊正의 월남어) 공세」 는 월맹이 1968년 舊正의 느슨한 분위기와 명절 민족 대이동의 혼란을 틈타 대규모로 벌인 기습전이었다. 초기에는 성공하는 듯 하였으나 궁극적으로는 군사적 패배를 가져 온 자살적 공세였다.
 
 이 공세에서 베트콩은 많은 간부들을 상실 하고 약 4만이 넘는 병력을 잃음으로써 월 남전쟁 전면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전 쟁은 월남 내의 집권층과 해방전선 간의 내 전이 아닌, 월맹 정규군과 월남 간의 남북 대결로 그 성격이 보다 뚜렷해졌다. 군사 적 패배에도 불구하고, 정치·심리적으로 월맹은 대승리를 거뒀다. 미국 언론과 사진 기자들의 과장 보도로 미국內의 여론은 크 게 악화되어 존슨 대통령은 1968년 3월31일 월맹에 대한 폭격중지를 선언하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다. 월맹측에게는 평화협정에 동의할 것을 촉구 하고 소련과 영국 등에게 협상 개최에 협조 해 줄 것을 요청했다.
 
 1968년 1월30일 舊正 아침, 朴正熙 대통령 도 金聖恩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지난 새벽 에 월남 전역에서 시작된 월맹군과 베트콩 의 대규모 기습작전에 관한 駐越 한국군 사 령부의 보고 내용을 전달 받았다. 金聖恩 前 장관은 『당시 駐越 한국군의 테트 공세 보고 내용과 駐越 미군의 보고 내용은 상 당히 달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蔡命新 당 시 駐越한국군 사령관은 1968년 테트 공세 와 관련하여 이런 증언을 했다.
 
 『그 이전 舊正에도 월맹군들은 휴전하자고 해 놓고 기습하곤 했기 때문에 1968년 테 트 공세 때에도 駐越 한국군들은 이미 비상 태세에 돌입해 적의 기습에 대비하고 있었 습니다. 1월30일 새벽 두시 반쯤 제가 머물 고 있던 나트랑 공관에도 월맹 정규군 50명 이 기습했지만 공관을 지키던 행정병을 포 함한 17~18명의 우리 병사들에 의해 전부 녹아버렸습니다. 우리쪽은 운전병과 행정병 이 태반이었지만, 아침이 되자 우리 아이들 이 포로도 6명이나 잡아 놨더군요. 각자 호 속에 들어가 움직이지 않고 적이 가까이 다가오길 기다려 한두 발씩만 사격을 가하 면 야간이기 때문에 아군의 위치를 발견할 수 없는 적들은 전부 당하고 마는 겁니다 . 이날 駐越 한국군은 도처에서 매복 작전 을 펴고 있다가 수많은 전과를 올렸습니다』 테트 공세 때는 베트콩 특공대들이 1·21 사태의 金新朝 일당처럼 월남의 티우 대통 령 관저를 습격하기도 했다. 이들은 대통령 관저에서 불과 50여m 떨어진 駐越 한국 대 사관을 경비하던 朴世煥(박세환·60·제2군 사령관 예편, 15~16代 국회의원·現 한나라 당 총재 국방 안보 특보)중위와 소대원들에 의해 대통령 궁 앞에서 궤멸되었다. 朴世煥 중위는 월남 대통령을 구해냈다고 해서 사이공의 영웅이 되었다. 고려대학교 정외 과를 졸업하고 ROTC 1기로 임관하여 비둘기 부대에서 파월 근무를 하던 중 이 전투에 서 화랑무공훈장, 한 달 후 재차 기습한 베 트콩을 격퇴해 인헌무공훈장을 타기도 했다. 당시 청룡부대는 추라이에서 호라이로 주둔 지를 막 옮겨 진지 구축도 채 안 된 상태에 서 1월29일 저녁에 월맹 정규군의 기습 공 격을 받았다. 美 해병대와 인접해 있던 한 국군 청룡부대는 훗날 해병 중장으로 예편 한 金然翔 준장이 당시 현지 사령관으로 전 투를 직접 지휘했다. 金然翔씨의 회고.
 
 『나도 전쟁을 많이 해 봤지만 그 전투만큼 은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전쟁에는 원리 원 칙이 있는데 그 전투는 그게 없었습니다. 양민도 아니고 베트콩도 아니고 적도 아니 고 아군도 아닌 정말 엉망진창인 전쟁이었 습니다. 대대장실 벙커 위로 로켓트 탄이 작렬하고, 밖에 나가보면 양민들을 앞세운 월맹군들이 뒤에서 로켓포를 쏘며 접근해 오곤 했습니다. 명색이 청룡부대장이면서 참호 속에 쪼그려 앉아 모기와 싸우면서 밤새 전투를 해야 했으니까요』蔡命新 예비역 장군의 회고.
 
 『청룡부대의 한 중대 전술기지에서 무전이 걸려왔어요. 「사령관님, 저 놈들이 부녀 자를 앞세워 꽹과리치면서 부대로 접근하는 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는 겁니다. 「절 대로 진지로부터 50m 이내로 접근시키지 말 라. 민간인으로 알고 접근시키면 너희들이 다 녹는다. 조명탄을 계속 쏘고 민간인들 머리 위로 초과사격(5발 마다 예광탄 한 발을 넣어 머리 위 2~3m로 사격하는 일종의 위협사격-注)을 하면서 경고방송으로 주민 들은 엎드리게 하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이러니 양민들은 엎드리고, 양민들 머리 위로 아군의 박격포탄이 날아가고, 다시 월 맹군들이 총부리로 밀어 양민들이 일어나 앞으로 오고… 두 서너 시간 동안 민간인들 은 청룡부대와 월맹군 사이에서 앉았다 일 어났다 했던 겁니다. 결국 월맹군들이 궤멸 됐습니다만 우리측도 정신이 없었지요』 테트 공세 때 월남의 후방에 있던 미군들은 비상대기를 하지 않았다가 습격을 받아 피 해가 컸다. 반면, 이날 하룻동안 한국군은 백병전을 치러 가며 총 441명을 사살하는 등 월맹군과 베트콩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한 달여 동안 지속된 테트 공세 직후 駐越 미군 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처음 으로 蔡命新 주월 한국군 사령관의 전술인 「단절 및 섬멸작전 (Cut & Destroy Oper ation)」이 월남전에서 옳은 전술이라고 인 정했고, 美 하원 국방위 소속 의원들은 월 남 현지 시찰을 통해 『한국군은 미군이 신 뢰할 수 있는 유일한 전우』라고 격찬했다. 舊正 공세는 저지되었지만 미국內에서 벌어 지는 反戰 무드와 厭戰(염전) 사상에 미국 의 전쟁수행 의지는 결국 무너진다. 朴世煥 한나라당 의원은 월남전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월남 참전의 가장 큰 의미는 우리 국민의 자주성과 자신감을 발견한 기회였다는 점 입니다. 세계 최강의 美軍이 우리의 용맹성 과 전투력에 경의를 표할 만큼 한국군들은 용감하게 헌신적으로 전투에 임했던 겁니 다. 저는 미군들이 우리를 우러러 볼 때마 다 일제 식민지, 미국의 解放地를 거친 한 국이 아니라 진정한 자주의식을 갖는 한국 인임을 당당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뿐 아니라 당시 파월 한국군과 근로자 모두가 그런 당당함을 가슴속에 키워가며 세계 무 대에 겁없이 도전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런 자신감의 원천이 바로 월남전이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테트 공세와 관련한 戰果 보고를 金聖恩 국 방장관으로부터 받아 든 朴대통령은 씩 웃 으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 한국군 1개 사단하고 미군 1개 사단 하고 붙으면 우리가 이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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