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北韓의 통일전략과 협상전략
1968년 1월23일 새벽 03시45분(미국시간은 1월22일 오후 1시45분) 公海(공해)상에서 美 해군 함정 푸에블로호가 납치된 사건은 美 해군 사상 106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사건의 처리과정에는 미국의 對韓·對北정책 과 남·북한의 통일전략 및 對美 협상전략이 뒤얽혀 있다.
1968년까지 지속된 남북한 간의 통일 정책과 관련하여 잠시 朴正熙·金日成 의 입장에서 살펴보자. 金日成은 1950년 6·25 남침 전쟁을 통해 무력통일 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1954년 4월26일 한국 통일문제를 주제로 한 제네바 회담을 통해 평화 공세를 시작했다. 당시 제네바 회담에 참석한 북한측 대 표 南一(남일)은 외국군 철수 및 감군, 모든 절차를 논의하기 위한 全조선 위원회 구성과 경제 및 문화 교류 및 남북한 동일 의석에 의한 선거 등 「 6개항 통일방안」을 제안했다. 북한의 평화공세는 1960년 4·19에 의해 다 시 촉발되었다. 그 해 8월15일 해방 15주년 행사에 참석한 金日成은 「연방 제 통일방안」을 제시하고 평화통일에 관한 호소와 성명을 연이어 발표했다. 4·19를 주도한 학생들은 통일열기에 들뜨기 시작했다. 1960년 7월29일 총 선거를 통해 등장한 張勉 정권 시절,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金日成의 연방 제 통일 방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이같은 남북한 간의 접근은 이듬 해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朴正熙에 의해 부정되었다. 당시 朴正熙 최 고회의 부의장은 『장면 정권과 같은 혼란에 처한 사회에서 국토통일을 주 장하는 것은 국가적인 자살행위나 다름없다』고 규정했다.
1963년 12월, 제5代 대통령으로 당선된 朴正熙는 군사적, 경제적으로 對南 우위를 확보하고 있던 북한의 연방제 통일안을 거부하면서 힘을 바탕으로 한 남북 협상이 가능할 때까지 통일문제를 잠정 보류하는 전략을 취했다. 金日成은 1967년 초 비무장지대에 대한 武裝도발을 시작으로 통일전략을 武力赤化 노선으로 전환했다. 1969년 닉슨 독트린과 주한 미군의 단계적 철수 가 가시화된 직후인 1969년 10월까지 3년 동안 金日成의 對南 武裝도발은 지속됐다.
金日成은 무력 도발로써 남한 사회에 공포감과 불확실성을 증대시켜 경제발 전을 가로막으려 했다. 동시에 金日成은 美 北간 단독 교섭을 통해 韓美 관 계가 이간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때까지 金日成의 전략이 한국과 미국에 공세적이었다면 미국의 안보우산 에 머물러야 했던 朴正熙 대통령은 미국과 북한에 대해 수세적이었다. 1· 21 사태와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에 미국의 존슨 행정부가 보여준 對北 유화 정책은 오히려 朴대통령으로 하여금 공세적 입장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 해 주었다.
朴正熙 대통령은 북한의 계속적인 무력도발과 미국의 對北 유화정책으로 안 보위기에 직면하자 「자주 국방」 노선을 선택, 미국과 북한에 正面으로 대 응했다. 그 결과 朴대통령은 金日成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남한 사회內에서 광범위한 국민적 단합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를 활용한 朴대통령은 3 選개헌과 維新(유신)을 통해 집권을 연장하면서 국가발전의 동력으로 전용한다. 한편, 金日成은 對南 무력 적화노선이 실패에 봉착하자 1970년 11월 노동당 제5차 대회를 통해 對南전략의 기본방향을 「인민민주주의 혁명노선」으로 정했다. 이는 「북한의 지원으로 남한의 인민들에 의해 남한 정부를 전복 , 容共(용공)정부를 수립하여 북한 정권과 합작으로 赤化통일을 성취하는 것」을 골자로 한 것이었다.
1971년 8월15일부터 1973년 8월28일까지 지속된 남북대화는 이런 평화공세 의 일환이었다(남북대화가 진행중이던 1971년 말부터 북한은 남침용 땅굴을 파기 시작했으며, 1974년 11월 이후 현재까지 네 곳이 발견되었다). 북한의 평화공세와 「인민민주주의 혁명노선」 전술은 朴대통령의 장기집권 에 반대하는 남한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북한은 이 전술을 통해 남한 사회의 反정부 인사와 감상적 자유주의자들을 포섭해 통일전선 을 형성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 노선은 1979년 10·26으로 朴대통령이 사 망한 이후 오늘날까지도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온 對南전술의 골격이다. 1968년 사건 당시 朴正熙-존슨-金日成간 삼각구도의 변화를 추적해 보자. 북한은 푸에블로호 납치 직후 함장 로이드 부처 중령으로부터 서면 자백을 받아낸 뒤 이를 방송함으로써 宣傳(선전)의 우위를 점했다. 「우리 푸에블로호는 동해안을 따라 요도에서 7.6마일 떨어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영해상으로 깊숙이 침입하여 여러 군사시설에 대한 정탐활동 을 벌이다가 자위적인 차원에서 출동한 인민군 해군 초계정에 나포되었다. 우리는 다만 북조선 정부의 관대한 용서만을 바랄 뿐이다―함장 로이드 부 처 중령」
사건의 본질은 나포된 함정의 영해(12해리)침범 여부였지만 북한은 이 문제 를 再조사하자는 미국의 제의를 묵살한 채 오직 영해 침범 사실만을 강조했 다. 북한은 사건의 진상을 독점하고 자의적으로 공개하며 정치공세를 폈다 . 북한은 선원들의 신문 자료, 선실內에 보관되어 있던 각종 비밀 문건 등 압수품의 단계적 공개와 81명 승무원들의 자백을 주기적으로 발표하여 미 국의 관심을 인질의 안전에 묶어두는 데 성공했다.
이 무렵 미국은 4년여 동안 월남전을 수행하면서 국내에서 反戰여론에 몰리 던 중이었다. 미국 정부는 사건 발생 1주일이 채 안 되어 對北 군사보복계 획을 포기했다.
이를 간파한 金日成은 미국에 대한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金日成이 푸에블 로호를 납치한 북한 해군에 격려문을 보낸 2월2일, 판문점에서는 최초의 美北간 非공개 회담이 시작되었다.
유엔이 인정하는 한반도 단독정부라는 정통성을 고수해 오던 한국의 朴正熙 정부는 미국과 북한이 동등한 자격으로 협상하는 상황을 우려하며 한국 정 부가 참여하는 공개 군사정전위원회 회담을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다. 한국 은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를 통해 미국이 1·21 사태를 제대로 거론조차 하 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한국의 판문점 회담 참가를 요구했다. 이로써 韓美간 외교적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1999년 1월13일 한국 외 교통산부에서 공개한 푸에블로호 사건 관련 외교문서에 따르면 당시 한국은 對北 강경자세를 취한 반면 미국은 푸에블로호 승무원의 안전한 송환을 위 해 유연한 對北 접근을 시도했으며 朴正熙 대통령은 미국측에 강력히 불만 을 표시하고 그 대가로 군사원조 확대를 요청하는 등 당당한 實利(실리)외 교를 펼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 朴正熙 정부는 한국만의 독자적인 무력 보복을 천명하여 미국의 존슨 행정부에 압박을 가했다. 존슨 美 대통령은 즉시 한국의 안보 및 방위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약속한다는 요지의 친서를 보냈다. 이어서 존슨 대통 령은 사이러스 반스 특사를 한국에 보내고 북한에 억류 중인 푸에블로호 승 무원 송환을 위한 미국의 노력을 양해해 줄 것을 요청했다(2월15일). 이 과 정에서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1억 달러의 추가 軍援(군원)과 韓美방위조약 개정 등을 얻어낼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