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치욕
1968년 2월 중순 金日成은 미국에 이어 한국의 무력 보복 가능성이 점차 사 라지자 조선인민군 창군 기념식(2월15일)장에서 『만일 계속해서 미국이 푸 에블로호 사건을 위협으로 해결하려 든다면 미국은 시체밖에 얻는 것이 없 을 것』임을 강조하고 『북한은 전쟁을 원하지 않지만 전쟁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런 강성발언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한국측으로부터 어떤 무력 보복의 가능성도 보이지 않자 북한은 본격적으로 『세계 최강의 미국이 범죄를 저질렀으며 미국은 이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한다』며 「사죄 문」 쓰기를 미국측에게 종용하기 시작했다. 미국 대표는 판문점 회담을 통 해 사죄문 대신 인수증만 쓰겠다며 북한측과 대립했다.
이 상황과 관련하여 1998년 12월7일, 북한의 평양방송은 푸에블로호 사건 30주년을 맞아 특별 방송을 하는 가운데 회담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 도했다.
<그때 미국놈들이 사과문을 거부하는 대신 선원 송환 때 인수증만 쓰겠다고 고집했다. 협상과정을 보고받은 우리들의 위대하신 수령 金日成 동지께서 는 『만일 미국놈들이 자기 주장만 계속 고집하면 우리는 회의에 흥미가 없 다』고 하면서 『한 달 반쯤 회의장에 나가지 말라』고 가르쳐 주시었다. 예상대로 미국놈들은 하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우리의 요구에 응했다> 당시 美 국무장관이었던 딘 러스크는 회고록을 통해 자신의 관료 생활 중 푸에블로호 납북사건으로 북한과 회담을 하던 기간을 「가장 고통스러운 1 0개월이었다」고 쓰고 있었다.
<미국이 제시한 모든 합리적인 제안들이 북측에 의해 단호하게 거부된 이후 우리는 가장 고통스런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어떻게 해서 미국 정 부가 사실과 다른 내용을 시인하지 않고도 승무원을 석방시킬 수 있느냐 하 는 것이었다>
金日成은 「푸에블로호 문제 처리는 기존 관례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방식 이어야 한다」는 방침을 고수하여 「사죄문」은 미국 정부 명의로 된 것을 받아내고 艦船(함선)은 북한이 몰수하며, 선원들은 인계인수가 아닌 「추 방」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북한의 협상전략은 「상대방의 약점 확보(인질 등)-선전전에서의 우위 확보 -작은 당근(양보), 큰 채찍(本末의 전도 및 억지와 모욕)-목표 달성(실리 추구)」으로 이어진다. 당시 북한에 기선을 제압당한 미국은 336일 동안 2 8차례의 회담을 통해 치욕적인 협상과정을 밟아야 했다.
1968년 12월23일, 판문점에서 미국측 대표 우드워드 준장은 『푸에블로호는 북한 영해에 침입했다는 수긍할 만한 증거가 없으며 우리가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대해 사과할 수 없다』고 말하고 『다만 승무원들의 석방을 위해 이 문건에 서명한다』고 발표한 뒤 북한측과 협의한 문서에 서명했다. 다음 은 당시 언론에 보도된 서명문 요지.
<(중략) 美 함선 승무원들의 자백과 북괴 대표가 제시한 증거물의 타당성을 인정한다. 미국 함선이 북괴의 영해에 들어가 정탐 행위를 한 데 대하여 사과하고, 앞으로 다시는 어떠한 미국 함선도 북괴의 영해에 들어가지 않도 록 할 것을 다짐한다(하략)>
서명문에 날인한 지 2시간 뒤인 오전 11시 반, 판문점을 통해 푸에블로호 승무원 82명과 시체 1구가 美軍측에 인계되었다. 이날 판문점에서 기자회견 을 가진 부처 함장은 억류 11개월 동안 『가장 조직적이고 악랄한 방법으로 테러를 당했다』면서 『외국인이라는 점에서 우리들과는 다르다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내가 겪은 북괴는 인간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고 말했다.
이날 북한 외무부는 성명을 통해 『이것은 美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수치스 러운 패배이며, 조선 인민이 거둔 또 한 차례의 위대한 승리』라고 했다. 다음은 당시 북한의 중앙방송 발표문.
『15년 전(1953년) 조선인민에 대한 전쟁에서 美帝 침략자들이 비참한 패배 를 당한 역사적 장소인 판문점에서, 全세계 인민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오늘 또다시 美 제국주의자들이 조선 인민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 문서에 서명하면서 무장간첩선인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해 사과하였다』 회담 이후 북한은 푸에블로호를 원산항에 정박시켜 反美 사상교육용으로 활 용해 오다 1999년 10월 말부터 金正日의 지시에 따라 평양 대동강 쑥섬 옆 「충성의 다리」 근처로 옮겨져 내외국인들에게 전시하고 있다. 이 지역은 1866년 8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평안감사 朴珪壽(박규수 )에 의해 침몰당한 곳이다. 제너널 셔먼호 사건을 북한은 金正日의 고조부 김응우(1848∼1878)가 결사대를 조직해 이곳에서 미국 해적선 셔먼호를 물 리친 사건으로 조작하고 「美 제국주의 침략의 첫 시작」으로 규정하고 있 다.
평양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에게 설명하는 해설자들은 당시 함정 납치에 참여 한 海兵출신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1999년 10월23일 중앙방송은 푸에 블로호 참관단을 취재 보도하는 가운데 『그들(관람객들)은 민간 해양 연구 선의 허울을 쓰고 우리 영해 깊이 침입했던 무장간첩선의 정체를 그대로 보 여주는 무기고와 정보종합실, 변전실, 장교선실, 사병선실, 12.7mm 대구경 기관총들, 고성능 안테나들을 비롯한 무장장비들과 정탐설비들을 돌아보면 서 美帝의 침략적 본성에 대해 다시금 깊이 새겨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