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부터 청와대나 상공부에서 수출확대 회의가 열리면 귀국했던 金玩熙 박사는 공식적으로 한국 전자업계를 대표해서 이 회의에 참석하게 된다. 이때 방직협회 회장이 上席에 앉고 金玩熙 박사가 차석에 앉았다. 섬유산업 이 제1산업이고 전자산업은 제2산업이었다. 金박사는 이것이 불만이었다고 한다.
『언젠가는 전자산업이 제1산업으로 인정받는 것을 보겠다고 다짐하고 197 8년에는 컬럼비아대학측의 양해를 얻어 휴직계를 내고 한국에서 전자진흥회 상근회장직을 맡아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정신없이 1년 동안 뛰었습니다. 전자산업의 진흥을 위해 청와대, 정부, 국회, 교육계, 산 업계 등 얼굴을 안 내민 데가 없었지요. 그리고 제10회 한국전자전람회를 1979년 9월24일부터 10월2일 사이에 개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崔珏圭(최각규) 상공부 장관에게 朴대통령이 참석해 테이프 커팅을 해 줄 것을 요청해달라고 했다. 陸여사 서거 후 朴대통령은 테이프 커팅 등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답변을 장관으로부터 받았다. 총리도 개막식에 참석하 지 못한다고 통보해 왔다. 金玩熙 박사는 화도 나고 답답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세요. 전자공업 육성은 나보다 한국 정부가 원했던 겁니다. 대 통령이 참석하는 것은 당연하고 또 그래야 전자업계의 사기가 올라가 전자 공업 붐을 조성할 수 있잖습니까. 그런데 이제 주인이 나몰라라 뒤로 앉아 버리니 교수직까지 접어두고 한국에 와서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나 하는 생 각이 들었어요』
1979년 9월18일, 金玩熙 박사는 朴대통령과 槿惠양에게 개막식에 참석해 달 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써 청와대 부속실로 보냈다. 그러나 金박사는 기대하 지 않고 개막식 전날 밤까지 마지막 점검을 하고 밤늦게 숙소로 돌아왔다고 한다.
『밤 10시쯤이었을 거예요. 상공부 장관이 전화로 개막식에 朴대통령과 槿惠양이 참석해 점심식사까지 할 예정이니 준비하라는 겁니다. 당시 시국이 얼마나 어수선했어요. 대통령이 머무는 것은 사전에 현장 조사를 하고 식 사할 경우에는 청와대에서 가구와 식기까지 가져올 정도였잖습니까. 개막식 까지는 12시간도 남지 않았고 통행금지도 있는데 무슨 재간으로 준비를 해요』金박사가 다음날 새벽 통행금지가 풀리자마자 현장에 달려가 보니 밤새 경호실에서 분주히 움직여 준비를 해놓았더란 것이다. 朴正熙 대통령과 槿惠 양은 이날 오전 10시부터 약 두시간 동안 전시관을 둘러 본 뒤 휴게실로 들어갔다. 朴대통령은 崔珏圭 상공부 장관과 金박사를 들어오라고 했다. 金玩熙 박사는 崔장관에게 『각하께 컬러 TV 방영과 시판을 건의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당시까지 전자업계는 컬러 TV를 시판하지 못하고 있었고 정부도 컬러 TV방송을 허락하지 않았다. 金玩熙 박사는 이것이 한국 전자공업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밀어붙이려 했지만 관료들은 대통령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金玩熙 박사가 컬러 TV 세트의 시판을 건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선진국에서는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던 겁니다. 개발도상국 중에서도 19 70년대까지 컬러 TV 방송을 하지 않는 나라는 한국뿐이었어요. 컬러 TV 방 송은 1970년대 초부터 한국 전자업계의 숙원이기도 했지요. 컬러 TV 방영과 판매는 국내 전자공업의 육성은 물론이고 외화벌이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 이었습니다.
국내 방송사들도 이미 준비를 다 해놓은 상태였고 기술과 자본이 축적된 전 자업체들은 컬러 TV를 생산해 미국 등지에 수출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미국 은 한국에서는 시판도 안 하면서 남의 나라에서 팔기만 하느냐고 제동을 걸 었지요. 그런데 朴대통령은 막무가내였어요』
1972년 金玩熙 박사가 처음 대통령을 설득하려 했다.
『각하, 국내 전자공업을 위해서도 돌파구를 열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컬러 TV 방영을 허락해 내수 시장을 넓히고 수출 물량도 늘려야 합니다. 3원색의 컬러 TV는 흑백 TV보다 부품이 세 배나 많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컬러 TV를 방영해야 국내 전자업계가 크게 신장할 수 있습니다. 특히 미국 이 한국에서 팔지 않는 컬러 TV를 미국 시장에 수출만 한다고 수입규제를 할 움직임도 있습니다. 게다가 이미 全세계가 컬러 TV 시대에 돌입했습니다』朴대통령은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金박사, 내가 대통령으로서 가장 듣기 싫은 말이 정부가 잘사는 사람만 위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것이오. 흑백 TV도 없는 사람 이 많은데 그보다 훨씬 비싼 컬러 TV가 나오면 없는 사람들은 더 비참한 생 각을 갖게 될 거요. 나도 물론 청계천 다리 밑에 사는 사람들까지 다 잘살 게 해줄 수는 없지만 못사는 사람들에게 더 초라한 생각을 갖게 해주기는 싫소. 그리고 金박사 말이 사실이라면 왜 상공부는 정식으로 내게 건의하지 않는 거요?』
金玩熙 박사가 朴대통령에게 컬러 TV 방영문제를 건의하겠다고 하자 崔장관 은 『큰일 납니다. 각하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서는 말하 지 맙시다, 박사님!』 하며 완강하게 말렸다고 한다. 金玩熙 박사는 장관에 게 미리 말하지 말고 직소했어야 할 것이었다고 후회했다.
『그리고 휴게실에 들어갔는데 朴대통령은 몹시 피곤한 듯 의자에 기대앉아 계셨어요. 12년간을 가까이서 보아왔지만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어요. 槿惠 양이 그 옆에 꼿꼿이 앉아 있더군요』
朴대통령은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金박사! 이제는 뭔가 좀 돼가는 거요? 전시된 제품은 다 외국산이지요?』朴대통령은 국내 업체들이 외국 제품을 외장만 조금 바꿔 직접 생산하는 것 처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점심 식사를 할 때엔 朴대통령과 槿惠양 , 朴忠勳(박충훈) 무역협회장, 金桂元(김계원) 비서실장, 車智澈(차지철) 경호실장, 吳源哲(오원철) 경제수석, 그리고 金玩熙 박사가 같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식사를 했다.
『예전 같으면 朴대통령이 먼저 말을 했을 텐데 이날은 표정도 무겁고 말씀 도 없으셨어요』
이때 金玩熙 박사의 의중을 잘 알고 있던 朴忠勳 무역협회장이 말을 꺼냈다.
『金박사, 어떻습니까. 10년 전에 전자공업 육성 방안을 만들고 이제는 직 접 진두지휘를 하시니…. 그때와는 많이 변했지요?』
『예, 그때 제가 5년 안에 전자제품 1억 달러 수출 계획을 세웠지만 다들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3년이 안 돼 그 목표가 달성됐잖습니까. 이런 속 도라면 곧 우리나라 제1산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지금처럼 수출 일 변도에서 탈피해 국내시장을 함께 개척해야 합니다』
金玩熙 박사는 컬러 TV 문제로 이야기를 옮겨가기 위해 朴대통령을 힐끗 보았다.
『朴대통령은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한 표정으로 식사만 하고 계셨습니다 . 피곤에 지치고, 착 가라앉은 듯한 표정이었어요. 거기서 제가 무슨 말을 합니까』
식사가 끝난 뒤 朴대통령과 槿惠양은 청와대로 돌아갔다. 吳源哲 수석이 金玩熙 박사에게 『저는 박사님께서 컬러 TV 문제를 각하께 진언하면 지원사 격할 생각이었는데요…』라며 아쉬워했다. 대다수가 총대를 멜 각오를 하고 나왔지만 아무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로부터 20여 일이 지났다. 전시회가 끝나고 한숨 돌리던 金玩熙 박사는 다시 컬러 TV 문제가 떠올라 10월26일 오전에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일전에는 電子 박람회에 나와주셔서 우리 업계에 큰 격려가 됐으며 더욱 분발하기를 약속했습니다. 전자업계는 여전히 수출이 신장되고 있으며 목 표액 이상을 달성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중략). 다만 현재 큰 家電 생산업체들의 실정이 매우 어렵게 돼 있습니다. 금성, 삼성과 같은 대기업체들이 도산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따라서 다음의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전자업계는 비약적인 발전이 있을 것입니다(중략). 잘 알고 계시는 컬러 TV의 시판 문제입니다. 이것은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 로나 전자공업 진흥을 위하여 반드시 통과해야 되는 관문입니다…」金玩熙 박사는 이 편지를 부친 뒤 업무차 구미로 내려갔다가 다음날 아침 朴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들었다. 金박사의 마지막 편지는 朴대통령이 읽어 볼 수 없었다.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던지요. 온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컬럼비아 대학에 돌아가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을, 朴 대통령이 전자산업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으로 달래고 있었죠 . 그리고 朴대통령께 뭔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한국 전자공업이 세계 시장에 우뚝 서는 것이었습니다. 朴正熙 대통 령이 나를 필요로 했던 단 한가지 이유가 그것이었으니까요. 나는 그걸 해 보고 싶었던 겁니다.
얼마 뒤 컬럼비아 대학에서 명예교수로 이름을 그대로 걸고 있겠느냐고 물어왔으나 거절했습니다. 내가 朴대통령을 잃은 순간 컬럼비아 대학도 잃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朴대통령 서거 후 金玩熙 박사는 전자공업진흥회 상근회장, 전자공업협동조합 상근 이사장직을 1984년까지 겸직하며 「電子新聞」의 前身인 「電子時報」를 창간했다. 현재는 전자공업계의 情報誌 「The Dr. Kim Report on K orea」의 발행인 겸 주간으로 활동하면서 TACI(국제기술평가주식회사)를 실 리콘 밸리에 설립, 이사장 및 대표이사로서 미국 산업기술의 국내 도입 전 문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그의 학문과 한국에 기여한 공로는, 美 국무성 산하 단체인 US-Asia Institute로부터 인정받아 1989년 「Acheivement Awa rd」(성취의 賞)를 받았다.
2000년 1월 초 訪韓한 金玩熙 박사는 기자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朴대통령과 한 無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국 전자공업에 도움되는 일을 평생 찾아서 할 겁니다』<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