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대통령에게 보고할 차트는 25명이 번역하고 7명의 전문가가 투입되어 완 성되었다. 1968년 8월1일 오전 9시, 청와대 집무실에는 朴正熙 대통령을 중 심으로 金正濂(김정렴) 상공부 장관, 申範植 대변인, 申東植 수석 비서관, 김동수 비서관 등이 배석했다. 金玩熙 박사의 첫번째 공식 보고가 시작되 었다. 총 80매의 차트가 모두 넘어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3시간30 분이 걸렸다. 에어컨을 켜지 않아 金박사와 차트를 넘기던 상공부 박임숙 국장의 이마엔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결론에 이르자 金玩熙 박사 는 이런 건의를 했다.
『…이처럼 전자공업은 제품 사이클이 매우 짧아서 국내에서 진득하게 독자 기술을 개발해서는 이미 늦어버립니다. 어떻게 하든 선진기술을 도입해 수 출제품부터 개발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전자공업진흥원을 설립하여 거 국적인 지원으로 단기간에 전자공업을 육성해야 합니다. 이상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대통령은 『수고 많았소. 점심 들면서 얘기를 계속합 시다』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사중에 생긴 에피소드 한 토막. 金正濂 상공부 장관이 金玩熙 박사를 칭 찬할 겸 자신을 낮출 겸해서 한마디를 했다.
『金박사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브리핑에 전문적인 용어가 너무 많아서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면 蓄電器(축전기)와 蓄電池 (축전지)가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식사를 하던 朴대통령이 말했다.
『아, 이 사람아. 축전기는 콘덴서(Condensor)고 축전지는 배터리(Battery ) 아니여!』
金玩熙 박사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식사를 마칠 때쯤 朴대통령은 金玩熙 박사가 제의한 전자공업진흥원에 대해 이런 질문을 했다.
『金박사, 그런데 누가 이것을 추진하지요?』金박사가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자 다시 『누가 진흥원을 책임지지?』라고 물었다. 金正濂 장관이 대답했다.
『각하, 이 안을 만든 金박사가 아니고는 이 일을 추진할 사람이 없습니다』朴대통령은 시선을 金玩熙 박사에게 돌린 뒤 신중하게 물었다.
『金박사, 돌아오겠소?』
金玩熙 박사는 순간 당황했다. 그는 대통령에게 설명을 했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과정에 있는 학생을 여러 명 지도하고 있는 중입 니다. 또 그들과 함께 미국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 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돌아올 경우 여러 명의 젊은 학자들과 연구 프로젝 트들이 큰 타격을 입습니다. 곤란할 것 같은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金玩熙 박사는 朴대통령이 무리하게 일을 추진하지 않 는 분이란 걸 그때 알았다고 회고했다. 朴대통령은 金正濂 장관에게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金장관, 그러면 기구를 따로 만들 것 없이 지금 있는 것을 활용하지. 어 차피 金박사 외에 자격 있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朴대통령이 언급한 「지금 있는 것」이란 정밀기기센터를 의미했다. 金玩熙 박사의 회고.
『그것은 내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과기처를 승격시켜 상 공부의 업무를 일부 떼어다가 전자공업진흥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란 어렴 풋한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진행은 한국 정부에서 잘하리라고 생각했죠. 저에게 진흥원을 맡기고 싶어하리란 것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전자공업진흥원 설립案은 그로부터 5년 동안 적임자를 찾지 못한 채 대통령 의 서랍 속에서 잠을 자야 했다.
朴正熙 대통령은 金玩熙 박사를 통해 전자공업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金玩熙 박사는 朴正熙 대통령이 말년까지 가까이 했던 몇 안 되는 민간인에 속한다. 朴대통령은 상공부 공업국장에서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근무했던 吳源哲(오원철) 수석을 金玩熙 박사에게 소개하면서 『이쪽은 우리 吳수석 , 아니 吳박사고, 또 이쪽은 우리 金박사요』라며 「우리」란 표현을 이름 앞에 붙이기 시작했다. 이후 金玩熙 박사가 한국에 들르면 『우리 金박사 , 어서 오시오』라며 반가이 맞아주었다. 金玩熙 박사는 공식 직제도 없이 상공부, 체신부, 과기처를 오가며 오늘날 정보통신부 관련 업무에 고문 역 할을 계속했던 것이다.
朴대통령과 金玩熙 박사 사이에 오고간 편지는 130여 통에 달한다. 金玩熙 박사는 朴대통령의 지원하에 금성사, 삼성전자, 대우전자, 아남전자 , 대한전선 등 국내 전자업계의 경영자들과 만나 정보를 주거나 외국의 믿 을 만한 회사를 소개해 주었다. 국내 기업에서 요구하는 정보를 조사해 주 기도 했다. 朴대통령은 그런 金박사를 귀하게 여겼다.
金玩熙 박사가 1976년 1월7일, 겨울 휴가를 받아 조선호텔에서 묵고 있을 때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가보니 朴대통령이 포항 부근 油田(유전) 개발 에 흥분해 있더란 것이다.
『집무실에서 朴대통령은 저에게 작은 유리병에 든 검은 기름 같은 걸 보여 주시면서 매년 석유 수입에 들어가는 외화 규모와 석유를 자급자족하게 됐 을 때 국가 이익과 산업 발전에 끼치는 영향 등을 열심히 설명했어요』 한참 신나서 이야기하던 朴대통령은 갑자기 멋쩍은지 『金박사! 어린애들이 돈 몇 푼 얻어서는 무슨 사탕을 살까 이것저것 궁리하는 것 같지?』라며 껄껄 웃었다고 한다.
1968년 여름, 金玩熙 박사로부터 전자공업 관련 브리핑을 들으며 국제시장 의 변화를 읽을 수 있게 된 朴대통령은 당시 성심여자고등학교 3학년에 재 학중이던 큰딸 槿惠양을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로 진학시켰다. 1974년 8월15일 陸英修 여사가 피살된 뒤 朴槿惠양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게되자 金玩熙 박사는 槿惠양에게도 연락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전자 공학을 전공한 槿惠양과 金박사는 전문용어로 대화를 할 수 있어 의견전달 이 매우 용이하고 효과적이었다고 한다.
『한국 전자산업 발전에 槿惠양이 세운 공적은 외부 사람들이 짐작하기 어 려울 정도입니다. 母親이 사망한 후부터 전자산업 육성에 큰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도왔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의 전자산업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陸英修 여사가 피살된 후 朴대통령은 공식행사나 테이프 커팅 같은 번거로 운 행사를 부질 없게 생각하며 꺼리기 시작했고, 그때마다 槿惠양이 그 자 리를 대신했다. 특히 1969년부터 시작된 電子展은 매년 朴대통령이 참관하 며 관심을 표명했지만 1977년에는 槿惠양 단독으로 참가했다. 1978년의 電子展에는 槿惠양이 朴대통령을 설득해 함께 참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