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의 메모 스타일은 꼼꼼하면서도 요약적이다. 필요한 사항만을 추려 내어 자신의 비망록에 기입하곤 한다. 일기장에 기입된 메모들은 주요항목 과 구체적인 숫자들로 채워져 있다. 대통령의 일기와 비망록을 살펴보면 그 가 평소에 무엇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는지 알 수 있다.
1971年 1月4日
1971년 1월4일자 일기장에 채워진 朴正熙 대통령의 메모는 일국의 대통령이 年初에 어떤 업무들을 점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朴대통령의 메모에는 國政 전반에 걸친 11개 항목과 경제기획원(EPB) 보고를 통해 점 검할 32개 항목 등 총 43개 항목의 점검 과제를 정리해 두고 있다. 朴대통령이 가장 우선해서 관심을 가진 것은 1970년 닉슨 美 대통령에 의해 駐韓 미군 1개 사단이 철수한 것과 관련한 사안이었다. 朴대통령은 메모 첫번째 항목에 「미군일부감축문제와 한미간 각서내용에 대한 견해 조정 문 제」를 기록하고 이날 오후 총리실에서 회의를 가질 것도 기입해 두었다. 이밖에도 이미 개통된 고속도로와 관련해 「고속도로 沿邊 이용문제 연구」 를 「農振公 事業」과 병행 검토할 것을 기록해 두는가 하면 7번 항목의 경 우 「국립공원 종합계획」이란 글 뒤에 「70, 12.15까지 지시한 바 있음」 이라고 기억을 상기시킨 부분도 있다. 1971년 1월 초에 이 내용을 쓴 것으 로 보아 해당 부처로부터 아직 보고되지 않은 事案을 점검하기 위함인 것 같다.
8번 항목을 보면 「보고 소요시간(2시간)」까지 적어두고 있어 바쁜 일정을 쪼개어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0번 항목엔 정부관리 기업체의 재물조사를 지시한 내용이다. 당시 陸濤均 소장과 20명의 요원들을 동원해 1970년 12월부터 업무에 착수한 것을 기록 해 두었다. 물자가 풍부하지 못했던 당시 정부의 재산과 물품들을 누군가 일일이 챙기지 않으면 주인없는 물건이 되어 사라지기 쉬웠을 때였다. 대통 령은 물자절약이란 목표를 제시하고 정부가 스스로 모범을 보이라고 지시했 을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의 지시 뒤에 이를 확인·감독하는 시스템을 만들 고 이 시스템을 다시 확인하는 대통령의 모습이 보인다.
4번의 「특수층 자제 사병이 서울의 집에서 출퇴근하는 것을 단속하라」는 지시, 11번의 「극빈층 출신 국가대표 선수에게 생활 보조금 2000만 원을 지원하라」는 메모는 朴대통령의 성향을 보여줄 뿐 아니라 대통령이 2000 만원 지출에 신경을 써야 하는 나라 살림 규모를 잘 보여준다. (메모1 참조) 金鶴烈 부총리의 보고서를 건별로 기입해 둔 1월4일자 메모는 19
71년 당시 朴正熙 대통령의 경제 정책과 노선을 잘 보여주는 문서이다. 대 통령 선거가 있는 해임에도 선거 항목은 맨 뒤에서 두 번째인 31번 항목에 기록돼 있다. 맨 마지막 줄에는 年初 국무회의 시간에 각부 장관들로 하여 금 중요사항 항목만 설명하도록 지시한 글이 눈길을 끈다. 자신이 지시한 내용을 스스로가 기록하고 이를 반드시 챙겨 보는 꼼꼼함을 엿볼 수 있다.
1/6 2차5개년 계획 GNP 35% 초과달성
1971년 1월6일 朴正熙 대통령은 일기장에 2차 5개년 계획이 목표의 35%를 초과달성한 내역을 기록해 두었다. 대통령이 관심을 둔 항목은 총 4개로 G NP, 1인당 GNP, 총 인구, 수출고 등이었다. 이 시기의 朴대통령은 자신의 경제개발계획을 계속 추진할 경우 한국을 선진공업국가의 대열로 진입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찼을 것이다.
1971년 2월2·3일(메모 3, 4)
1971년 2월2일자 및 2월3일자 메모에는 朴대통령의 일상적인 점검 사항들이 기록돼 있다. 2월2일에는 3차5개년 계획을 잠정 승인하면서 농수산부문 투 자계획의 再검토를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2월3일 메모는 1월23일 발생한 KAL기 납북 미수사건과 관련한 有功者 포상 문제 및 先烈子孫들의 극빈자 조사가 눈에 띈다. 3번 항목을 보면 기념사 초안을 비서실에 지시할 예정인 것으로 보이는데, 朴正熙 대통령은 3·1절 , 5·16혁명, 8·15 광복절 연설에 특히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다.
1971년 2월 연초 지방 초도 순시 메모
朴正熙 대통령의 일기장에 기록된 메모 한 편은 성실한 가정주부의 가계부 이거나 꼼꼼하고 부지런한 중소기업 사장의 장부를 보는 느낌이다. 세세항 목마다 單價(단가) 곱하기 수량의 곱셈과 결과가 기록돼 있고 이 수치를 다 른 수치와 비교해 가며 國益(국익)에 有不利(유불리)함을 따지고 있다. 1971년 2월6일부터 20일까지 朴대통령은 연초 지방초도순시를 다녀왔다. 한 번 가서 휘 둘러보고 오는 것이 아니라 지방마다 잘된 것, 못된 것들을 자신의 몫처럼 챙기고 있다.
1번 항목은 지방행정 농촌행정의 基本目標가 「농촌근대화사업」이다. 이것 은 「농어민 소득 증대」를 통해 가능하며 따라서 「농어민 소득증대사업」 과 「미곡증산」이 전략적 목표가 됨을 요약해 쓰고 있다.
「(1) 工業團地는 하나하나 매듭짓고 工場을 誘致(유치)할 것.
여러 개 벌려만 놓고 完結된 것은 하나도 없는 京畿道例」
朴正熙는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어도 권력을 통해 상향하달식 지시만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현장을 방문하고 확인하며 감독하는 것 이다. 1971년 초 경기도 도지사는 대통령에게 혼이 났을 것이다. 여러 개 벌려만 놓고 완결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니 말이다.
「⑵ 漁業은 저장, 가공, 수송(유통)을 잘 해야 所得이 增大된다.
⑶ 농한기를 여하이 활용하여야 부업으로 소득을 높이느냐에 연구지도要」
朴대통령의 뇌리 속에 남아 있는 농촌의 前 근대성의 원인은 게으름이었다 . 농한기를 활용해 부업을 올리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고 농민들에게 가르쳐 야 한다는 전술적 목표가 확인된 부분이 (3)이다. 그래서 「연구지도 要」 라고까지 써 두고 있다.
(4)번 항목부터 (11)번 항목까지는 성적이 우수한 예를 비롯해 각 도의 농 업 생산량을 세세하게 기록한 부분이다. 따라 가며 읽어보면 朴正熙 대통령 은 한국 농업 전반을 자세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어떻게 소득을 증대시켜 농촌을 근대화할지에 대한 청사진을 확고하게 갖고 있었음을 알게 될 것이 다. 맨 끝줄의 「均等分配 政治的 배치는 經濟建設에 가장 非能率的」이라 고 쓴 구절이 보인다. 朴대통령은 경제적 효율성을 저하시키는 지역적, 정 치적 고려를 혐오한 것이다.
1971년 9월1일(메모 5)
1971년 9월1일 오후 5시30분부터 8시30분까지 朴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경제 각료, 한국은행 총재, 경제과학심의회 등 경제전문가들을 모아놓고 긴급 연 석회의를 열었다.
주제는 물가, 세금, 불황 등 당면한 하반기 국내 경제의 불안정 요인에 대 한 광범위한 협의였다.
이 무렵 한국 경제는 1960년대 도입한 차관들의 원리금 상환이 시작되고 있 었고 경제성장과 함께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기업들이 규모를 팽창하는 과정 에서 제도권 금융의 미비로 인한 私債 의존도가 높아져 금융시장이 불안정 해 가던 시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제 환율 급등으로 인한 국내 경기의 침체기가 도래하자 朴대통령이 긴급 연석회의를 갖게 된 것이다. 국가 경제의 위기 신호를 감지한 朴대통령이 이날 밤 회의를 마친 뒤 서재 에 홀로 남아 기록했을 일기장 속의 메모에는 대책을 강구하고 비관적인 상 황 속에서도 낙관적인 자세를 견지하며 경제 위기를 헤쳐 나갈 방법을 고민 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