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5월13일 朴正熙 대통령은 자가용차
에 몸을 싣고 경인공업지대를 암행시찰했다 . 몇 차례 신호대에 걸려 섰다 갔다를 되풀 이했다.
교통순경들도 지나간 다음에야 대통령임을 알고 허둥지둥했다. 한국 기계제작소에 들 른 朴대통령은 보고를 들었다. 회사측에선 『우리가 만들 수 있는 통신부품을 체신부 에선 외국에서 수입하려 하고 있다』고 말 했다. 朴대통령은 즉석에서 李厚洛(이후락 ) 비서실장을 시켜 黃鍾律(황종률) 체신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게 했다. 『앞으로 한 국 기계제작소의 제품을 쓰는 것을 검토하 라』고 지시했다. 이 회사가 신청한 産銀( 산은)으로부터의 융자건도 즉석에서 해결해 주었다.
대통령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여의도 축 대공사장을 찾았다. 먼지가 뽀얗게 일고 있 는 현장을 둘러봤다. 그는 건설사업소장에 게 돈봉투를 건네면서 노동자들을 위해서 쓰라고 당부했다. 朴대통령은 14일 오후 청 와대에서 열린 정부·여당 연석회의에서 『 기계공업을 육성하기 위해 상공부의 국산화 촉진 위원회를 활용, 대통령 주재로 이 위 원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문제를 검토하 라』고 지시했다. 그는 또 공장을 지을 때 국내에서 기계를 살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특혜를 주라는 당부도 했다. 5월16일 朴대통령은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 린 군사혁명 7주년과 5·16민족상 수상식에 참석, 致辭(치사)를 했다. 대통령은 『우 리 힘으로 내 조국, 내 향토를 지키겠다는 범국민적인 氣運(기운)을 조직화하고, 우 리의 생활자세와 정신적 태도를 합리화하고 경제화하여 자주국방과 자립경제 건설에 솔선수범하자』고 말했다. 그는 『우리 가 슴속에도 환히 트인 마음의 고속도로를 건 설하자』고 덧붙였다. 朴대통령은 『우리는 不遠(불원) 통일을, 우리 힘을 主軸(주축 )으로 이룩할 단계에까지 왔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경회루에서 열린 축하연에는 혁 명에 가담했다가 성공 후에 박정희-김종필 세력과 충돌하여 獄苦(옥고)를 치른 적이 있는 金東河(김동하·혁명 당시 예비역 해 병 소장), 金在春(김재춘·혁명 당시 6관구 참모장, 중앙정보부장 역임), 朴蒼岩(박창 암·혁명검찰부장 역임), 柳原植(유원식· 최고회의 재경위원장 역임)씨도 보였다. 朴正熙와 첫 부인 김호남 사이에 난 첫 딸 朴在玉(박재옥)은 남편 韓丙起(한병기·건 설협회 공제 조합 이사장)와 함께 나타났다 . 그녀는 陸英修(육영수) 여사와 정답게 이 야기를 나누었다. 朴씨는 혁명 전 陸英修와 함께 살았는데, 분위기가 陸여사와 비슷하 여 친 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고 한다.
韓丙起는 朴正熙 사단장의 부관으로 있다가 朴在玉과 결혼했었다. 5·16군사 혁명 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서 살고 있었 다. 그는 미국 신문에 한국 政情(정정)이 어지럽다는 기사가 연일 실려 울화통이 치 밀었다. 『이런 짓거리 하려면 5·16은 무 엇하러 했는가』하는 생각이 나더라고 한다 . 그는 곧바로 서울로 날아왔다. 청와대에 들어가니 陸英修 여사가 그의 손을 붙들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것을 보고 더욱 화 가 치민 한병기는 장인을 만나면 싫은 소리 를 해야겠다고 별렀다. 그날 따라 朴대통령 은 잔뜩 화가 나서 청와대로 돌아왔다. 韓 씨가 집무실로 들어가니 朴대통령은 『왜 왔어?』라고 쏘아붙이듯 말했다.
『정치를 이 따위로 하시려면 윤보선씨 한 테 줘버리는 게 낫겠습니다』
『이놈이!』
朴대통령이 재떨이를 집어던졌다. 韓씨는 이를 피했다. 「와장창」하는 소리를 듣고 李厚洛 비서실장이 뛰어들어왔다. 朴대통 령은 나가라고 했다. 韓씨는 朴대통령에게 계속 대들어 한 30분간 서로 언성을 높였 다고 한다.
집무실을 나오니 朴鐘圭(박종규) 경호실장 이 韓씨의 팔을 끌어가며 『왜 그랬느냐』 고 했다. 韓씨는 『각하 좀 똑똑히 모십시 오!』라고 면박을 주었다. 그뒤 金炯旭 정 보부장이 韓씨를 불러 술을 받아주고 돈도 많이 주었다. 韓씨는 朴대통령이 金부장에 게 『이놈이 나한테 뗑깡을 부리더라』고 했고, 金부장이 자신을 달래려고 그러는 것 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5월21일 朴正熙 대통령은 내무장관에 朴璟遠(박경원·45) 교통부 장관, 법무장관에 李澔(이호·54) 내무장관, 문교 장관에 權五柄(권오병·53) 법무장관, 재무장관에 黃鍾律(황종률·59) 체신장관, 농림장관에 李啓純(이계순·57) 경남도지사, 교통장관에 姜瑞龍(강서룡·51) 국방차관, 체신장관에 金泰東(김태동·50) 경제기획원 차관을 임 명했다.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만 51세였다. 각료들도 50代가 주축이었다. 같은 날 兪鎭午(유진오) 前 고려대 총장이 야당인 신민당의 총재로 추대되었다. 영입 된 兪총재는 金大中(김대중) 의원을 원내총 무로 지명했으나 金泳三(김영삼) 당시 총무 의 반대로 의원총회의 인준을 통과하지 못 했다. 兪총재는 鄭成太(정성태) 의원을 다 시 지명하고 金泳三 의원을 설득한 끝에 겨 우 총무 인준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이후 30년 이상 한국 정치의 常數가 되는 兩金의 경쟁관계는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깊어 지기 시작한다.
高大(고대) 총장을 지낸 兪鎭午씨를 야당( 당시는 민중당) 총재로 영입하는 데 있어서 金泳三 당시 정무위원이 교섭대표였다. 金泳三 의원은 서울 필동의 兪鎭午씨 집으로 찾아가서 입당을 권유했었다. 원래 민중당 의 계획은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를 후 보로 밀려고 했으나 尹潽善에게 후보자리가 돌아갔고 尹후보의 패배 이후 兪鎭午씨가 통합야당인 신민당의 총재가 되었던 것이다. 1968년 6월 金泳三은 金大中 의원을 원내총 무 후보로 지명한 兪鎭午 총재에 대해 반기 를 들었는데 이 소식을 안 兪鎭午 당수는 의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협조를 부 탁했다. 그는 柳珍山(유진산) 부총재와 高興門(고흥문) 사무총장을 金泳三 의원에게 보내 설득하려고 했으나 金의원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金泳三 前 대통령은 작년에 펴낸 회고록(대 통령 시절 회고록이 아님)에서 이렇게 썼다. <黨內에서는 모두들 金大中이 원내총무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 분위기였다. 무엇보다 도 그는 동료의원들로부터 인간적인 신뢰감 을 얻지 못했다. 金大中은 내가 원내총무로 있을 때 상도동 우리집에 가장 많이 찾아 온 국회의원 중 한 사람이었다. 특히 분과 위원회를 배정할 때면 자주 찾아왔다. 그는 언제나 재경분과위원회를 원했다. 재경위 는 모든 국회의원이 바라던 노른자위로 알 려져 있었다>
6월5일의 신민당 의원총회에서 金大中 총무 지명에 찬성한 의원은 16명, 반대가 23명 , 기권 2표로 부결되었다. 5일 뒤 兪鎭午 총재는 鄭成太 의원을 총무후보로 지명했으 나 金泳三의 협조를 얻지 못해 부결되었다 . 너무했다고 생각했던지 金泳三은 兪鎭午 총재를 찾아가 『이번에 후보로 지명하는 사람을 무조건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兪鎭午 총재는 鄭成太 의원을 再지명했고 , 의원총회에서 인준되었다. 鄭총무는 5개월 가량 일하다가 사표를 냈고 , 金泳三 의원이 그의 생애에서 네 번째로 원내총무가 되었다.
1968년 5월22일 朴正熙 대통령은 강원도 삼 척군 北坪읍의 雙龍시멘트 東海대단위 공장 을 시찰했다. 그는 보고회에서 직접 매직펜 을 들고 「북평읍의 도시계획은 이렇게 하 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다. 조선일보 정 치부 崔秉烈 기자(현재 한나라당 부총재)가 쓴 정치면 가십란에는 이런 지적이 있었다. <이곳 관리들은 (대통령으로부터) 브리핑을 듣는 입장에 서고 말았다. 서울 외곽의 도 시계획도 대부분 朴대통령의 아이디어에 따 라 하는 것이라는데, 그 실력이 여기서 처 음으로 공개된 것이다. 朴대통령은 금년 8 월부터 연간 180만t을 생산하여 동양 제1을 자랑하게 되는 雙龍시멘트가 오는 1971년 부터는 연간 420만t 생산으로 규모를 확대 , 단위 공장으로는 세계 제1의 규모가 된다 는 보고를 받곤 철도수송은 물론 해상수송 등에 정부가 만반의 뒷받침을 해주라고 지 시. 朴대통령은 특히 서울 - 삼척 간의 육 상수송에 도움이 된다는 金成坤 의원의 말 을 듣고는 『雙龍이 주동이 되어 민간자본 을 동원, 民營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것이 어 떻겠는가』라고 한마디 했다> 흔히 朴대통령의 국가발전 전략을 국가주도 라고 한다. 朴대통령은 그러나 민간의 창의 성과 자발성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국 가가 개입해야 한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했 다. 지금도 실현되지 않고 있는 民營고속도 로 發想(발상)도 그런 경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