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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로 몰린 金鍾泌
 1968년 5월28일 워싱턴에서 韓美 국방장관 회담을 마친 崔榮喜 국방장관은 M16소총 공장을 건설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다음 날 駐越(주월)미군사령관 윌리엄 C. 웨스트 모얼랜드 장군이 訪韓(방한)했다. 그는 이 튿날 한국을 떠나면서 『우리는 언제나 한 국군의 增派(증파)를 환영한다』고 말했다 . 미국은 이미 2개 전투사단을 월남전선에 파견해놓고 있던 한국 정부에 대해 1개 사 단을 더 보내달라고 요구했으나 朴正熙 대 통령은 거절했다. 1968년 1·21 청와대 습 격사건 이후에 朴대통령은 한국 방어가 더 욱 시급한 과제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1968년 5월25일 공화당은 의원총회를 긴급 소집, 당무위원인 金龍泰(김용태) 前 원내 총무와 6代 공화당 의원이자 문공위원장 출 신이던 崔永斗씨 및 宋相南씨(예비역 공군 대령)를 害黨(해당) 행위 혐의로 제명을 결의했다. 제명 이유는 이들이 한국국민복 지연구회라는 단체를 發起하여 같은 공화당 원들을 포섭대상으로 함으로써 당 조직에 큰 차질을 가져왔다는 점이었다. 金龍泰씨 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 사건의 배경을 이 렇게 적고 있다.
 <한국국민복지연구회라는 단체를 착상하여 주동적으로 추진해왔던 崔永斗씨는 중앙정 보부 연구실장 출신이요, 宋相南씨는 同연 구실 차장 출신이다. 이들은 나에게 회장직 을 맡아달라고 했던 것이므로 나는 별 생각 없이 승낙을 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1 0일 만에 올가미에 걸려든 것인지 아니면 미리 파놓은 함정에 빠진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제명이란 전격작전이 개시된 것 이다. 그러나 세상만사에는 완전범죄도 없 을 뿐 아니라 비밀도 없다. 그 사건이 일어 난 지 10년도 안 되어 그 진상이 한 꺼풀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즉, 5·16혁명주체이 며 인천 출신인 柳承源(유승원) 의원이 나 에게 몇 번이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다. 그도 이미 故人이 되었으나, 국민복지연구 회 사건은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던 자신이 저지른 일이라고 실토했다. 그는 나와 혁명동지요, 술을 좋아했던 서민적인 사람이다. 그의 고백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군대에서 데리고 있던 張모 예비역 소령이 찾아와서 공화당 내에 한국국민복 지연구회라는 反국가단체가 조직되어 대통 령 각하를 비방하고 있으니 그대로 방치할 수 없어 고발한다』라고 말하며 同연구회 의 취지서와 입회원서를 갖다 주더란 것이 다. 張은 나의 선거구인 大德(대덕)·燕岐 (연기) 지구당의 조직부장을 하던 사람인데 사고를 저질러 당에서 쫓겨나자 吉在號(길 재호) 사무총장이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 하여 오히려 그를 중앙당으로 데리고 가 썼 던 것이다. 柳承源은 진상을 파악하기 위하 여 吉在號 사무총장과 金炯旭(김형욱) 중앙 정보부장에게 확인을 시켜 대통령에게 보고 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일은 참으로 미안하게 되었 다』고 몇 번이나 되풀이 사과를 했다. 참 어이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張모는 조직 부장에서 쫓겨나 원한을 가지고 있었을 것 이고, 또 그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음모에는 서로 이해가 일치했던 것이므로 쉽게 이뤄질 수 있었다 . 그러니 張이 누구의 흉계를 가지고 청와 대를 찾아가게 되었나 하는 것은 삼척동자 도 알 만한 일이요, 不問可知(불문가지)가 아니겠는가.
 
 때마침 5월23일, 朴대통령은 영남지방을 순 시중이며, 金鍾泌 당의장은 제주도에 내려 가 있는 사이를 이용하여 나를 중앙정보부 로 연행했던 것이다. 그리고 24시간 만에 당에서 除名(제명)하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작전」이 전개된 것이다> 金龍泰를 연행한 정보부 수사관은 녹음준비 를 한 다음 자백을 강요했다고 한다. 「朴 대통령이 三選改憲(삼선개헌)을 해서 다시 출마하는 것은 결사반대한다」하는 내용으 로 자백하지 않으면 복지회의 각도 지도위 원으로 추대해 놓았다는 申允昌(신윤창), 李承春(이승춘), 吳元善(오원선), 柳光鉉( 유광현), 朴鍾泰(박종태), 芮春浩(예춘호) 의원 등 전원을 反국가단체 결성 혐의로 입건하겠다고 협박했다는 것이다. 金씨는 『나는 그들로부터 그런 내락을 받 은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아무 소용 이 없었다고 한다. 하도 우격다짐으로 나오 기에 金龍泰씨는 崔永斗, 宋相南씨와 대질 시켜달라고 요구했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다 . 그는 자신이 삼선개헌을 반대한 것은 사 실이지만 그 조직을 그런 목적으로 만든 것 은 아니기 때문에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삼선개헌 반대의 주동자로 몰려 모든 책임을 나 혼자 지기로 하고, 그 대신 누구에게도 피해를 입혀서는 안 된 다는 약속 아래 공화당에서 떠나기로 결심 했다』고 한다.
 
 金龍泰씨는 「朴대통령 이외 딴 분이 정권 을 잡았을 때는 자신들의 설 자리가 없어진 다고 생각한 세력이 지금까지 누리고 있던 권세와 영화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기를 쓰 고 삼선개헌을 추진했다」고 썼다. 1968년 5월27일자 동아일보 해설기사는 「 당내 주류계의 보스로서 金鍾泌 의장의 차 기 집권을 바로 자기 일인 양 꾸준히 布石 (포석)하고 활동해온 그(金龍泰 지칭)의 정 치적 성분에 비추어 그의 제명은 다름 아닌 당주류의 비극으로 풀이된다」고 했다. 이 신문은 이어서 「삼선개헌을 저지하는 등 護憲(호헌)투쟁을 벌여 金鍾泌 의장을 차기 대통령으로 밀기 위한 비밀 포섭공작 을 전개했으며 이것이 黨內분파 행동을 했 다는 이유가 되어 제명되었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당주류에겐 치명적인 타격임에 틀림없다」고 지적했다.
 
 金龍泰, 崔永斗, 宋相南 세 사람의 제명은 金鍾泌 당의장이 朴正熙 대통령을 만나, 裁可(재가)를 받아 이루어졌다. 朴正熙는 나중에 鄭求瑛 공화당 고문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金龍泰 의원이 최영두 前 의원과 같이 소 위 복지회라는 것을 만들어 무슨 일을 저질 렀다면서 金鍾泌이 내게 왔었어요. 金鍾泌 의장이, 「이 서류에 결재를 해주십시오, 도무지 金龍泰 의원은 당 소속 의원으로서 있을 수 없는 행동을 한 것이니 제명을 해 야겠습니다」 하고 서류를 내놓길래, 「그 렇다면 해야지」 하면서 「모든 걸 당의장 한테 맡기겠다」며 내가 사인을 했습니다. 당의장이 그렇게 하자고 해서 사인한 것뿐 인데 그것이 어떻게 金의장의 기분에 맞지 않았던 것인지 하여튼 좋지 않게 생각하여 별안간에 이렇게 탈당을 했으니 난들 어떻 게 하겠습니까』(李英石편 鄭求瑛 회고록) 朴대통령의 이런 설명은 金鍾泌의 다음 증 언과 다르다.
 
 
 『하루는 영감이 날 부르더니 「이런 게 있 는데 이게 뭐냐」 그래서 「뭔지 잘 모르겠 습니다. 알아보겠습니다」그러고 나와서 金龍泰씨한테 물었어요. 「이게 뭐냐」고. 「 저희들끼리 모여서 친목단체를 만든 건데, 그걸 하다가 보면 요다음 대통령은 아무개 다 하는 소리가 나올 수 있는 거지, 그게 무슨 대통령 옹립을 위한 조직이 됩니까. 다 픽션을 만들어서 그러는 겁니다」고 그 럽디다.
 
 대통령에게 그대로 보고를 드렸어요. 그랬 더니 대통령께서 「아니래. 전국적으로 조 직을 해가지고 이제 1971년 대통령 선거에 서 날 제쳐놓고 임자가 뭘 한다며?」이런 얘기를 하십디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 런 일도 없고, 되지도 않고, 또 제 자신도 그런 거 모릅니다. 김모가 자꾸 꾸며서 그 럽니다. 그러니 괘념 마십시오」하고 말씀 드렸지요. 내가 1967년 대통령 선거만 끝나 면 그만두겠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기회를 놓쳐서 그러고 있던 참인데 나를 몰아내려 고 그런 움직임(복지회 사건)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속에서 불덩어리 같은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金鍾泌은 그 전에도 당의장을 그만 두기로 작심한 적이 있었다. JP와는 육사8기 동기 인 尹必鏞 당시 육군방첩부대장의 증언이다. 1967년 5월의 대통령 선거를 여섯 달쯤 앞 둔 1966년말 윤필용 준장은 金鍾泌 공화당 의장으로부터 『좀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 다. 金의장은 침통하게 말했다.
 
 『尹장군, 나 그만두기로 했소. 당의장인 내가 金炯旭이한테 도청을 당하고, 우리 집 을 출입하는 사람은 일일이 체크되어 가택 수색까지 당하고 있어요. 국회의원들도 우 리 집을 드나들면 공천 길에서 멀어진다고 해요. 사흘간 골똘히 생각한 끝에 결심했 어요. 각하께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그 만두기로 했어요』
 
 尹준장은 『0을 하나 더 보태 30일 간만 더 생각해 보라』고 했다. 金당의장은 『그보 다도 월등히 오랜 기간 생각해 왔다』면서 이미 대통령 면회신청을 해두었다고 말했다. 尹준장은 金당의장 집을 나오자마자 예고 없이 청와대로 갔다. 대통령 집무실로 올라 가는데 李厚洛(이후락) 실장 방에서 나오는 李실장 및 金炯旭 부장과 딱 마주쳤다. 尹준장이 『각하께 급한 보고가 있다』고 했더니 李실장은 『아웃라인을 이야기 해줄 수 없느냐』고 했다고 한다.
 
 『보고 전에는 이야기 못하겠습니다』
 
 『혹시 金당의장에 관한 것도 들어 있습니까』
 
 『있습니다』
 
 
 『이미 그 문제에 관해서는 각하의 결심이 끝났습니다』
 
 
 『그 외에도 긴급보고 사항이 있습니다』 이래서 尹준장은 집무실에서 朴대통령과 獨對(독대)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이뤄진 대화를 尹씨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단다.
 
 『선거를 앞두고 당의장을 바꾸면 안 됩니다』
 
 『종필이는 너무 옹졸해. 남을 포용할 줄 몰라. 심지어 자네까지 자르라고 하더군』
 
 『저는 백 번 잘려도 좋은데, 선거가 걱정 입니다』
 
 
 『이후락이는 나에게 종필이 칭찬을 많이 하는데 종필이는 이후락이 욕만 해』
 
 『제가 두 사람이 멀어진 이유를 보고드리 겠습니다』
 
 尹준장의 간곡한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대통 령은 申範植(신범식) 대변인을 부르더니 『 당의장 면회신청은 거절하라』고 지시했다 . 그러고는 申대변인을 통해 金당의장에게 친서를 전했고 그 일요일에 대통령이 당의 장을 골프에 초대, 사의를 번복시켰다는 것 이다.
 
 尹씨는 『그때 나는 누구 편도 아니었지만 선거를 생각하니 자연히 4인체제보다는 金 씨편을 들게 되더라』고 했다. 尹필용은 朴대통령이 金鍾泌을 미워하고 있 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많다고 했다. 金炯旭 부장은 전과자를 고용, 金鍾泌에게 위해 를 가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전 과자가 방첩대에 자수, 尹준장은 대통령에 게 보고했다.
 
 
 『종필이가 너를 그렇게 미워한다면 넌들 가만히 있겠느냐』는 것이 대통령의 반응이 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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