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주한유엔군 사령관이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에 보고한 자료가 있다. 1967년의 경우, 한국에선 218건의 交戰이 있었다. 북한군과 국군+미군 사이에 휴전선에서 122건, 후방에서 96건의 무력 충돌이 있었던 것이다. 이 교전으로 북한군은 228명이 사망, 57명이 포로로 잡혔다. 한국군과 미군은 131명이 전사, 294명이 부상했다. 한국측 민간인 사망자는 22명, 부상 53명이었다. 남북한 雙方에서 381명의 戰死者가 발생했으니 戰時下의 사회라고 봐야 할 것이다. 1960년대 초부터 시작된 군사력 건설의 絶頂에 있었던 북한 사회는 완전히 전쟁준비 태세에 돌입해 있었으나 한국 사회는 그렇지 않았다. 시끄러운 政爭이 있었고, 야당은 갖 출범한 향토 예비군 폐지안을 국회에 제출할 만큼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언론도 정부 비판을 줄이지 않았다. 그런 소란 속에서 경부 고속 도로 건설과 월남파병에 의한 정글 속의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朴正熙는 건설과 전투, 이 兩面의 국가전략 속에서 苦鬪하고 있었다. 1967년에 再選되었던 그는 다가오는 1971년 대통령 선거에 현행 헌법으로는 출마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헌법을 고쳐 3選이 가능하도록 만들 것인가의 여부에 대한 朴正熙의 결단은 시간의 강요를 받고 있었다.
1968년 북한군의 對南침투 작전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해 남북한 사이엔 356건(236건은 휴전선, 120건은 후방에서)의 무력 충돌이 있었다. 북한군은 321명이 사망, 63명이 포로로 잡혔다. 한국군과 미군 162명이 전사했고 294명이 부상했다. 한국측 민간인 사망자도 35명에 이르렀다. 1953년 이후 남북한 간의 무력충돌이 가장 치열했던 해가 1968년이었다. 남북한 쌍방 518명의 전사자가 한 해에 발생했으니 사실상 전쟁상태였다. 일부 戰史家들은 이 시기를 「제2의 한국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죽일 놈 같으니…』
이 무렵까지 朴正熙로서는 金日成과 개인적인 원한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정치적 상황에 의해서 맞대결하는 관계였지만 그 職務를 떠나선 인간적인 감정이 개재될 계기가 없었던 것이다. 1968년 1월21일 북한의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기습하여 朴正熙를 죽이기 위해 서울 중심부까지 침투한 이른바 1·21사태는 朴正熙로 하여금 金日成을 증오하도록 만들었다. 그 2년 뒤(1970년 6월22일) 金日成은 또 다시 朴正熙의 목숨을 노린다. 북한의 무장특공대 3명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들어가 현충문 지붕에 무선식 기폭장치로 폭파되는 장치를 설치하던 중 실수로 폭발이 있었고 한 특공대원이 죽었다. 이 현충문 안뜰에는 분향대가 있었다. 朴대통령이 6월25일 이곳에서 분향할 때 근처 숲 속에 숨어 있던 특공대원이 무선 원격조종장치를 누르면 터지도록 할 작정이었다. 1983년 10월9일 미얀마 아웅산 묘소에서 있었던 폭파사건(북한 공작원이 全斗煥 대통령을 노린 이 사건으로 17명의 장차관급 고관들이 사망)과 같은 수법이었다. 1974년엔 在日 북한공작 조직에 포섭된 文世光이 국립극장에서 8·15 기념 연설을 하고 있던 朴正熙를 저격하는 과정에서 옆 자리에 있던 대통령 부인 陸英修를 살해했다.이런 식으로 자신의 암살을 끈질기게 추진하는 者에게는 聖人君子라도 원한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다. 朴正熙의 金日成에 대한 관계가 바로 그러하였다. 1970년대에 朴正熙 대통령이 자주국방 전략을 추진하면서 방위산업을 건설해 나갈 때 청와대의 담당 수석비서관으로서 朴대통령을 보좌했던 吳源哲은 이런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한국형 경제건설 제7권-내가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한국형경제정책연구소 펴냄).
● 吳源哲이 휴전선에서 땅굴이 발견되었다면서 사진을 붙여 보고를 했다. 朴대통령은 사진을 뚫어지게 보더니 한참 후에 얼굴을 들고 먼 산을 바라보면서 『죽일 놈 같으니…』라고 했다. 격한 말투도 아니고 조용한 語調였다고 한다.<朴正熙 대통령의 청와대 일기 1975년 3월10일자에는 철원 북방 휴전선에서 북한측이 판 제2 땅굴이 발견된 데 대한 소감을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땅굴은 폭 2m, 길이 3.5km. 북괴의 집요한 남침야욕의 또 하나의 실증을 우리는 얻었다. 이런 판인데도 북의 남침야욕이 없다고 운운하는 이 나라의 일부 정치인들의 무책임한 소리가 이러고도 또 있을 것인가? 북한 공산당들은 언제나 민족적 양심으로 되돌아가서 동족끼리 단합해 통일된 조국을 재건하여 만방에 떳떳하게 살아볼 날이 올 것인가. 오 神이여! 북녘 땅에 도사리고 있는 저 무지막지한 공산당들에게 제 정신으로 돌아가도록 일깨워 주시고 깨닫게 하여 주소서」>
● 朴대통령은 이따금 『金日成에 대해서는 나만큼 아는 사람도 없을 거야』란 말을 하기도 했다. 1972년 7·4 공동성명 이후 북한의 수석 대표 朴成哲이 대통령을 예방하게 되어 있었는데, 吳源哲이 선물 목록을 써서 대통령의 결재를 받으러 올라갔다. 그는 남한의 공업력을 자랑하기 위하여 비싼 전자제품을 선물 목록에 포함시켰다. 대통령은 목록을 앞에 놓고 『金日成이 진정으로 평화를 원하는 것은 아닐 거야. 남북회담이 성공할지는 두고 보아야 해. 金日成의 眞意는 적화통일에 있으니 남북회담을 성공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회담을 통해서 우리와 미국의 태도를 시험해 보려고 할 거야』라고 말하면서 값이 싼 현대 조선자기를 선물로 결정했다.
● 朴正熙는 金日成의 失政에 대한 보도가 나올 때는 신중했다. 그는 『金日成이 모든 경쟁자를 숙청하고 절대 권력자가 되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의 능력은 인정해야 돼. 그는 군사력을 그만큼 강화하고 경제도 어느 정도 발전시켜놨으니 통치 능력도 있는 것 아냐?』라고 말한 적도 있다.
● 朴대통령은 『金日成은 적화통일에 가장 큰 장애물은 나라고 보고 있는 것이야. 그러니 나를 없애자는 것이지』라고 말했다. 이런 말 속에는 「金日成과 대적할 수 있는 인물은 나뿐이며 이것은 나의 역사적 역할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