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孝祥 국회의장은 7월15일 기자협회 초청 연설에서 개헌 문제에 공식적으로 언급했 다. 그는 『공화당이 현명하다면 대통령 3 選을 가능하게 하는 개헌은 하지 않을 것이 다』고 말했다. 그는 『3選 개헌을 해가지 고는 1971년도에 再집권을 할 수가 없을 것 이다』고 말했다.
이 발언의 의미는 개헌을 안하겠다는 데 있 는 것이 아니고 그런 발언이 나올 정도로 개헌 가능성이 떠오르고 있었고 이 점을 확 인해준 데 있었다. 改憲이란 말이 공개적으 로 논의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심상치 않은 조짐이었다.
이날 문교부는 중학교 入試(입시) 過熱 문 제를 해소하기 위해 1969학년도부터 서울의 각 중학교를 學群制(학군제)로 나누어 무 시험 추첨 입학을 실시키로 했다. 2차 연도 인 1970학년도에는 전국 5개 도시로 이 제 도를 확대하고, 1971년도까지는 전국적으로 실시하여 중학교 입시를 없애버리기로 한 것이다. 이 제도개혁의 발표는 權五柄 문 교장관이 했다.
7월19일 해군 기지가 있는 경남 鎭海 앞바 다에선 구축함 서울함에 이름을 붙이는 命名式(명명식)이 있었다. 朴대통령은 諭示( 유시)에서 『전쟁을 좋아하는 국민은 망하 고 전쟁을 잊어버린 국민은 위태롭다』란 孫子(손자)의 말을 인용했다. 그는 서울함 내부를 둘러보다가 즉석에서 「有備無患」(유비무환)이라고 붓글씨를 써 주었다. 북한정권측의 對南침투가 최고조에 달한 1968년에 만들어진 有備無患은 「한 손에 망치 들고 한 손에 소총 들고 일하면 서 싸우고 싸우면서 건설하던」 시대의 가 장 유명한 口號(구호)가 된다. 중앙정보부장 金炯旭은 7월20일 목포 앞 荏子島(임자도)를 거점으로 하여 暗躍(암약) 해온 북괴간첩단을 적발, 118명 중 간첩 2 7명을 구속, 검찰로 보냈다고 발표했다. 정 보부는 발표문을 통해서 「지하당 全南道責 인 鄭泰洪 등 간첩단은 1962~1967년 사이 북한을 오가며 1845만원의 공작금을 받아 지하당을 조직, 활동해왔다」고 밝혔다. 이 간첩단의 두목격인 鄭泰洪은 45세로서 전남 목포시 출생, 前 남로당원으로서 국가 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6·25 전쟁으로 탈옥, 북한에 4회 왕복 , 노동당 입당, 공작금 800만원 수령, 지하 당 포섭활동을 벌인 것으로 발표되었다. 이 간첩단이 받은 공작지령 가운데는 「혁 신계통 중간정당에 침투하라」, 1967년5월 의 대통령 선거 때는 「제1야당 후보를 지 원하라」, 같은 해의 국회의원 선거 때는 「극렬적인 야당인사를 지원하라」, 「출판 사를 경영하되 반공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 위 안에서 反美-反政府 사상을 고취하라」 는 내용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과 관 련하여 신민당 金大中 의원은 정보부의 조 사를 받았다.
<荏子島 간첩 사건의 주범 鄭泰默(정태묵· 정보부 발표문에선 鄭泰洪)은 본인의 목포 상업학교 1년 선배이며 선거기간에도 2~3차 만나서 본인의 선거에 협력하는 태도를 표 시한 바 있음. 그는 광복 직후의 좌익활동 을 청산하고 家業인 염전에만 전념하는 줄 알았지 그런 엄청난 일을 하는 줄 몰랐음 . 그는 매일 시내의 다방에 나오고 거리를 활보하고 다녀서 일반 시민 하고 조금도 다를 바 없었음. 同 사건이 나자 하루는 당 시 정보부의 金炯旭 부장의 보좌관이 와서 출두를 요청하므로 시청 앞 뉴코리아 호텔 에서 金부장을 만났음. 金부장은 『임자도 사건의 주범 정태묵을 조사중 金선생의 이 름이 나왔는데 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 나, 일단 이름이 거명된 이상 서류 정리상 조서를 안 받을 수 없으니 미안하지만 참 고인 조서에 응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음. 그리하여 선거기간 중 타인과 同席으로 2 ~3차 만났으며 선거 후도 서울서 1차 만난 것을 사실대로 진술해 주었음. 이것은 후 일에 간접적으로 들은 이야기이나 정태묵은 정보부에서 취조받던 중 진술하기를 『선 거기간 중의 金大中의 연설을 들으니 반공 정신이 투철하여 전혀 다른 말을 꺼낼 여지 가 없는 것으로 보고 아예 공작하려는 생각 을 갖지 않았었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음 >(1980년 5월20일 군검찰 진술서에서 인용) 7월26일 문교부는 국민교육헌장 초안을 발 표했다. 이 초안의 전문별 작성자는 정치 朴俊圭(박준규·서울대 문리대 교수), 사회 李萬甲(이만갑·서울대 문리대 교수), 역 사 金聲近(김성근·서울사대교수), 교육 鄭範謨(정범모·서울사대 교수), 철학 李奎浩 (이규호·연세대 문리대 교수)씨였다. 朴대 통령은 헌장 심의회에서 『큰 意義를 갖는 이 헌장제정이 몇몇 인사나 정부 意思로 좌우되어서는 안 되며, 국민의 예지와 總和 (총화)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 초안은 여러 차례의 수정을 가하여 다듬어 졌고 그해 말에 공포되었다. 이 국민교육헌장 제정은 1968년 7월4일 대 통령이 교육장전을 만들라는 지시를 權五柄 문교부 장관에게 내려보낸 것이 계기가 되 어 착수된 것이다. 朴대통령은 『교육장전 이 민족주체성 확립에 기여할 수 있도록 연 구하라』면서 『서구문화의 도입에만 의존 하지 말고 우리 고유문화의 바탕 위에서 새 로운 민족관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朴正熙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지 는 않았지만 그런 외래사상이 한국의 역사 와 전통, 그리고 문화에 뿌리박아야 한다는 생각에 투철했다. 민주주의의 土着을 가능 케 하는 것은 민족주체성이고 이는 국적 있 는 교육을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