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증
박정희의 아버지 박성빈이 동학란을 진압하는 쪽에 섰던가, 동학혁명 에 가담했던가 하는 쟁점에 대한 기록과 증언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박 정희와 누님 재희 등 직계친족들의 기억에는 박성빈은 '동학혁명에 가담 했다가 체포되어 죽을 뻔했다'라고 찍혀 있다. 박정희의 증언을 많이 참 고 로 하여 쓰여졌던 김종신(청와대 공보비서관)의 '박정희 대통령' 전 기(어린이용)에는 박성빈이 '동학군의 지도자로 참여했고 체포되었다가 고종의 사면령으로 해서 살아났다'고 되어 있다.
5·16군사쿠데타 후 이낙선소령(당시 최고회의의장 공보비서관)이 정 리해둔 '박정희 의장 신상 비망록'에는 '1894년 동학란이 경북에 침입하 였을 때 박성빈은 용감히 의병을 일으켜 성공, 그 공이 지대하여 무과. 영월군수'라고 적혀 있다. 1967년에 한국일보 정광모기자가 쓴 '청와대' 에도 박성빈이 동학란을 진압하는 관군편에 섰던 것으로 되어 있다. 1971 년에 세워진 박성빈의 묘비에는 '영변군수로 임명되었으나 시국의 어려 움으로 부임하지 않고 동학란을 피해서 선산에 왔다'는 요지의 설명이 있다.
박성빈이 동학란을 진압하는 쪽에 섰다는 이야기는 그 공으로 해서 영월(또는 영변)군수로 임명되었다는 것으로 연결이 되는 경우가 많아 의도적이란 느낌을 준다. 박성빈과 조석으로 같이 생활했던 친족들의 증 언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1976년2월17일 청와대 공보비서관실에서 정리한 박대통령의 가계기록은 대통령이 읽고나서 교정까지 본것이다.이 문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박대통령의 선친 성빈공은 무과에 급제하여 고종시 평안도영변 군수 에 제수되어 통훈대부란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조가 말기에 접어들면 서 매관매직의 폐풍이 생기고 관기가 문란해져 성빈공은 전임자가 자리 를 내어주지 않아 중앙정부의 부임명령만 기다리다가 끝내 고향인 경상 도 성주에 머물고 말았다. 고향에 있으면서 중앙정계에 대한 울분으로 세상사에 실망하고 있던 성빈공은 1892년12월 동학당이 당시의 학정에 못이겨 혁명을 일으키자 지방 지도자로서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관군 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893년 당시 정부는 국민들 사이에 팽배해 있 던 불평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서 대사령을 내렸다. 이때 성빈공도 자유 의 몸이 되었다. 그 후 성빈공은 우울한 마음을 풀 길이 없어 책과 술을 벗삼아 세월을 보냈다. 이때부터 부군을 모시고 자녀를 기르는 고된 책 임이 백남의여사에게 돌아갔다.]
박정희가 1970년에 이미 자신의 자필수기에서 동학란을 동학혁명이라 고 쓴 것은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보다도 더 진보적인 역사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학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면서 박성빈이 동학군을 진압하는 편 에 섰다는 기록도 사라진다. 실제로도 박성빈은 동학군에 가담했을 가능 성이 더 높아 보인다. 지금 상모동 근방에 생존해 있는 박정희와 동연배 인 노인들은 '동학혁명'이란 용어를 쓰지 않고 동학란이라 한다. 박정희 가 동학운동에 대하여 높은 평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거기에 가담했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알고 자랐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박성빈은 그러면 정말 무과에 급제하고 영변(또는 영월)현감으로 임 명되었던가? 여기에도 의문이 많다. 우선 기자가 국립중앙도서관 고문서 실에서 찾아낸 '고령박씨세보 기미본(1919년판)'에는 박정희의 조부인 박영규를 끝으로 하여 그의 세 아들인 성빈, 용빈, 일빈은 등재되어 있 지않다.
1871년에 태어난 박성빈이 무과에 급제할 수 있었던 기간은 갑 오경장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된 1894년까지이다. 그가 무과에 급제했다면 한 세대 이후에 만든 족보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을 가능성은 퍽 낮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박정희가 죽은 뒤에만들어진 최근의 고령박씨 족보에는 28세손 박성빈에 대해서 '자화익무과...통훈대부영변군수'라고 적혀 있다.
통훈대부는 당하관정3품의 문관 품계이다. 무과 급제자가 문관의 품 계를 받았다는 것은 의문을 낳게 한다. 무과 급제자가 현감으로 임명된 다는 것도 이상하다. 박정희의 기억에 따르면 선친은 무과에 급제하여 효력부위라는 계급을 받았다. 이 품계는 서반, 즉 무관의 말단인 종9품 이다. 그런데 선친이 임명되었다는 현감은 동반, 즉 문관의 종6품 자리 이다. 더구나 영변현감은 조선조의 최고법전인 경국대전에서 정3품이 부 임하는 곳으로 명시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무과급제자 명단을 기록한 '무과방목'에도 박성빈의 이름은 없다. 물론 이 문서는 결락이 없는 온 전한 것이 아니므로 결정적인 반증이될 수는 없다.
박성빈이 영변(또는 영월)현감으로 임명되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없 다. 무과에 급제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그 가능성도 낮은 것으로 파악된 다. 조선조 시대의 무과시험과목은 궁술 기창 격구 등 무예와 경서및 병 서 등 학술이었다. 시험은 초시 복시 전시의 3중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초시는 지방에서 치러졌다. 어쩌면 박성빈은 초시에서는 합격되었으나 서울에서 치는 복시에서 탈락했을 지도 모른다. 둘째 딸 재희가 말한 '벼슬하시겠다고 서울에 자주 올라가시다가 가산을 탕진했다'는 것이 복 시를 보기 위한 서울행을 가리키는 것이아닌가 하는 추측은 가능하다.
박성빈은 상모리에서는 '박선달'이라 불렸다. 선달은 원래는 '문무과 에 급제하고도 벼슬을 얻지 못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특히 무과급 제자는 벼슬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선달이 주로 그런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무과 초시에만 합격하고 본 시험에서는 낙방한 사람에게 도 선달이란 호칭을 붙여주었다. 과거제도의 엄격성을 잃게 되는 조선조 말기에 가면 요사이 박식한 사람한테 붙이는 애칭으로서의 '박사'처럼 씩씩하게 생긴(또는 다소 건달기가 있는) 사람에게 '선달'을 붙여주었다.
박성빈에게 '선달'이란 호칭이 붙었다는 것은 그가 무과의 1차 시험 에는 합격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급제했을 것 같지는 않다는 판단을 내리 게 만든다.
고령 박씨는 모든 박씨와 마찬가지로 신라의 초대왕 박혁거세를 시조 로하고 있다. 박씨의 여러 분파중 고령박씨는 박혁거세의 29세손이며 신 라 54대왕인 경명왕의 둘째 아들 언성을 제1세로 치는 본이다. 청와대 공보비서관실의 '박대통령 가계'문서는 '대통령가의 중흥조는 이조 중엽 의 숙동 직강공으로서 대통령은 그의 16세손이다'고 했다.
'직강'은 성 균관에서 유생들을 교육하던 일종의 주임교수와 같은 직책이었다. 고령 박씨로서 유명한 사람은 조선조 민중들의 영웅 어사 박문수였다. 청와대 문서에는 '대통령가는 이와 같이 문관의 집안이었으나 4, 5대 전에 이르 러 무관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대대로 무과에 급제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고령박씨의 기미본 족보를 살펴보면 가까운 윗대에 큰 벼슬 을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박정희의 조부 박영규까지 4대는 독자였다. 박영규는 1840년1월8일 경북 성주군 사읍촌에서 박이찬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성주에는 고령박 씨들이 대대로 많이 살아 자신들을 '성주파'라 부르기도 했다. 박영규는 아들 삼형제를 두었다. 박영규가 솔가하여 칠곡군 약목면으로 이사를 한 까닭은 알려져있지 않다.
박영규는 1914년2월24일 약목에서 만74세로 죽었다. 그의 묘는 약목면 관남동의 작은 언덕에 있다. 약목면의 테두리 를 이루고 있는 산자락이 바라다보이는 곳이다. 건너편 오른쪽 산속 골 짜기로 들어가면 수원 백씨사람들이 모여 살던 작은 마을이 있다. 박성 빈은 이 문중의 처녀 백남의에게 장가를 들게 된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