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大中씨와 金日成은 1970년대에 이미 연방제 통일방안이란 말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 말 뜻은 다르다고 해도 상호 접근할 수 있는 친근성은 있었다. 즉, 1970년대에 이미 金大中 식의 통일방안은 대한민국의 통일방안(대한민국이 북한정권을 평화적으로 해체, 북한주민을 구출한다는 의미에서의 反共자유통일)보다는 金日成식 통일방안에 더 가까이 가 있었다.
金大中씨는 상기 진술조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산통일도 용납할 수 없지만 반공통일이나 멸공통일을 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연방제 통일방안은 통일조국의 이념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金大中씨는 1992년까지도 『통일조국의 정치이념은 통일을 이룰 세대가 결정할 문제이다』라고 말했었다. 통일조국의 이념을 확실히 하지 않은 통일방안은 종착역을 설명하지 않고 열차 손님을 구하는 행위라고 할 것이다. 金大中씨의 1970년대 통일방안이 대한민국의 공식 통일방안보다는 金日成의 그것에 더 가까이 있었다는 의미는 그의 통일 정책 관련 인맥 또한 그러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밀하고 집중적인 탐구가 필요하거니와 여기서는 두 가지 사례만을 든다. 상기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 신문조서엔 이런 대목이 있다.
<―피의자(金大中)는 裵東湖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은 사실이 있나요.
『양일동씨의 소개로 알게 된 이후 유진산, 양일동과 만나는 자리에서 수차 만났는데 제가 미국으로 출발하려고 숙박비를 계산하려 했더니 당시 숙박비 30만 엔 정도를 배동호가 이미 계산했습니다』
―민족시보를 알고 있나요.
『그 신문은 裵東湖가 의장으로 있는 민족통일협의회의 기관지로 旬間으로 발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피의자가 본 민족시보 신문 내용에 대해 말하시오.
『(前略) 7월1일자에서는 「대민족회의를 소집, 고려연방공화국으로」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金日成의 사진을 게재하고 金日成의 통일방안을 게재하는 한편, 6·23 외교선언을 반대하는 裵東湖의 논평이 실려 있었습니다』
―한민통 일본 본부 발기 준비를 위해 여러 차례 모임이 있었는데 그 경비는 누가 부담했나요.
『본인은 부담한 사실이 없고 裵東湖 등 그 사람들이 회의장소 임대료 식대 등을 전부 지불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묵고 있던 호텔에 찾아오면 커피 등 음료수는 제가 대접했습니다』>
우리 역대 정부는 裵東湖를 북한의 지령을 받는 인사로 단정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