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維新은 수단, 목표는 중화학공업 건설
朴正熙의 대야망: 이슬숲 프로젝트(1):吳수석, '중화학공업 건설을 위해 유신 선포, 국력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했다'
20만t 선박이 출입할 수 있는 아시아 최고의 항만조건, 3억 평의 평지, 여기에다가 800만 명이 입주하는 세계 최대의 산업기지를 만들어 「제2의 싱가포르」를 세운다는 「중부종합공업기지 기본구상」은 「2000년대의 국토구상」, 「임시행정수도 건설계획」과 함께 역사 속에서 묻혀 버렸다. 이슬숲(加露林)의 꿈을 이어받을 대통령 후보는 없는가?
趙甲濟   
 박정희의 대야망: 가로림만(加露林灣-충남 서산市 일대) 프로젝트
 「이슬숲」에서 선진국으로 만나자
 
 
 수출 백억 불!
 
 1977년 12월22일, 드디어 한국은 연간 100억 불(달러) 수출 목표를 달성했다. 목표연도는 1980년이었는데 3년을 앞당겼다. 朴正熙 대통령은 이날의 일기를 기사처럼 적었다.
 <백억 불 수출의 날. 백억 불 수출목표 달성 기념행사 거행. 오전 10시 장충체육관에서 각계인사 7000여 명이 참석, 성대한 행사를 거행하였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던 해 연간 수출액이 5000여만 불이었다. 그 후 1964년 11월 말에 1억 불이 달성되었다고 거국적인 축제가 있었고, 11월30일을 수출의 날로 정했다. 1970년에는 10억 불, 7년 후인 금년에 드디어 백억 불 목표를 달성했다. 서독은 1961년에, 일본과 프랑스는 1967년에, 네덜란드는 1970년에 백억 불을 돌파했다고 한다.
 10억 불에서 백억 불이 되는 데 서독은 11년, 일본은 16년(1951~1967)이 걸렸다. 우리 한국은 불과 7년이 걸렸다. 1981년에 가면 200억 불이 훨씬 넘을 것이다. 1986년경에 가면 500억~600억 불이 될 것이다. 백억 불,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자. 새로운 각오와 의욕과 자신을 가지고 힘차게 새 전진을 다짐하자>
 朴대통령은 이날 무엇보다도 100억 달러 수출전선에서 일한 한국 근로자들의 勞苦(노고)에 감사했다. 그는 이해 4월13일 일기에서 창원공단을 시찰한 소감을 썼는데 이런 대목이 보인다.
 <모든 산업전사들이 땀 흘리며 일하고 있는 모습이 거룩하게만 보였다. 눈에서 사라지지를 않는다>
 
 
 『임자, 100억 불 수출을 하자면 무슨 공업을 육성하지?』
 
 1970년대 한국의 국가적 목표는 「10월 유신, 100억 불 수출, 1000불 소득」이란 구호로 표현되었다. 국민들의 개인적 목표는 「마이 카」와 「아파트 입주」로 상징되었다. 朴대통령은 목표를 수치로 정해야 안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관념적 말장난보다는 누구도 속일 수 없는 수치를 신봉했다. 100억 불이란 수치를 맨 먼저 꺼낸 것도 朴대통령이었다.
 1972년 5월30일 중앙청 홀에서 무역진흥확대회의가 열렸다. 회의가 끝난 뒤 朴대통령은 전시된 수출상품들을 둘러보았다. 이날 오후 朴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로 吳源哲 제2경제수석비서관을 불렀다. 朴대통령은 집무용 의자에 앉아 있다가 『吳수석, 차 한잔 들지』 하면서 방 한가운데에 있는 소파 쪽으로 가서 앉았다. 보통은 회의용 탁자 쪽 의자에 가서 앉는데 소파에 앉는 일은 드물었다. 吳수석은 긴장했다.
 『임자, 100억 불 수출을 하자면 무슨 공업을 육성하지?』
 吳수석은 「지난 2월에 1980년도 수출목표를 50억 달러로 확정지었는데, 왜 갑자기 100억 불 이야기를 할까」 하고 의아해했다. 吳수석은 이런 때를 대비한 복안은 갖고 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한 뒤 외치듯 말했다.
 『각하! 중화학공업을 발진시킬 때가 왔다고 봅니다. 일본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경제를 소생시키기 위한 첫 단계로 경공업 위주의 수출산업에 치중했습니다. 현재의 우리나라와 사정이 같습니다.
 그 후 일본의 수출액이 20억 달러에 달할 때 중화학공업 정책으로 전환했습니다. 이때가 1957년입니다. 그 후 10년이 지난 1967년에 일본은 100억 달러의 수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기계제품과 철강제품이 일본 수출의 主力(주력)상품이 되었습니다』
 朴대통령은 생각에 잠기더니 『자료를 갖고 와서 다시 설명해』라고 말했다.
 吳수석은 사무실로 돌아와 우선 朴대통령의 국가운영에 대한 철학과 전략을 먼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朴대통령의 저서와 연설문을 다시 읽어 보고 그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朴대통령은 우리의 역사적 과업을 민족의 중흥과 평화통일로 설정하고 있다. 이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은 富國强兵, 즉 국력증강이다. 국력의 바로미터는 수출이다>
 
 
 유신은 수단, 목표는 중화학공업 건설
 
 吳수석은 며칠 뒤 金正濂(김정렴) 비서실장과 함께 朴대통령에게 100억 달러 수출을 위한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보고했다.
 『일본은 1957년 중화학공업 선언을 하고 10년 만에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했습니다. 1957년에 일본은 산업구조상 중화학공업 비율이 지금의 우리나라와 같은 43%였습니다만 10년 뒤엔 78%가 되었습니다. 수출품목에서 차지한 중화학공업 제품의 비중도 1955년엔 41%였는데, 1967년엔 67%로 늘었습니다.
 중화학공업 유치에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와 경쟁관계에 있는 동남아 국가들보다 먼저 출발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현 시점이 중화학공업 진입의 마지막 버스를 탈 수 있는 기회입니다. 단순조립 공업은 임금이 올라가면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한국의 임금상승률은 대만을 앞지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대만보다 더 빨리 중화학공업을 이룩해야 합니다』
 옆에서 金正濂 실장은 『각하, 자금 문제는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내자 동원은 별 문제가 없고, 외자는 수출이 증가하는 한 차관이 가능합니다』라고 말했다. 심각하게 듣고 있던 朴대통령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吳수석, 우선 중화학기획단 같은 것을 구성해서 계획을 짜도록 해보지』
 朴대통령은 金실장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중화학기획단 구성에 대해서 내각에 지시하시오』
 朴대통령은 초인종을 누르더니 비로소 커피를 시켰다. 기분이 대단히 좋을 때 하는 행동이다. 吳수석은 설명을 덧붙였다.
 『중화학공업을 건설하게 되면 남성 기능공이 주역이 됩니다. 일자리가 많아지고, 급료도 여성 기능공보다 많아집니다. 그래서 국민생활이 윤택해지고 국민소득도 급상승합니다』
 吳수석의 이날 보고가 1970년대 한국의 가장 중요한 발전 테마가 되는 중화학공업 건설의 시작이었다. 이 大사업이 朴대통령이 던진 「수출 100억 불」이라는 화두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1972년 상반기 朴대통령은 남북회담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방위산업 건설 계획, 100억 달러 수출 계획, 그리고 중화학공업 건설 계획을 준비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朴대통령이 그해 10월17일 유신조치를 통해서 헌법 기능을 정지시키고 국회를 해산한 뒤 유신체제를 발족시킨 배경을 이해하는 데 단서가 된다.
 朴대통령은 유신체제 수립의 당위성을 7·4 남북공동 성명을 만들어 낸 남북회담과 국제정세 변화에 대응한 체제정비에 두었으나, 유신체제의 실질적 목표는 중화학공업을 건설해 한국을 선진국 문턱으로 밀어 올린다는 것이었다.
 吳수석 같은 이는 『중화학공업 건설을 위해서 유신체제를 선포해 국력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金鍾泌 前 총리도 『朴대통령으로부터 「삼선개헌과 유신체제의 목적은 중화학공업 건설에 있다」는 취지의 말을 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즉 권력의 집중은 수단이고, 목표는 중화학공업 건설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유신의 중간평가
 
 吳源哲 수석은 혁신적 발상을 잘 하는 엔지니어 출신으로서 독창적인 방법으로 중화학공업 건설을 밀고 나갔다. 그 핵심은 이러했다.
 <朴대통령으로부터 지시받은 「방위산업 건설 계획」, 「100억 달러 수출 계획」 「중화학공업 건설 계획」의 3개 과제를 한 시스템으로 통합한다. 즉 兵器(병기)를 생산하는 중화학공업, 수출을 하는 중화학공업을 건설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중복투자 방지, 건설비 감축, 작업량 확보와 가동량 증가, 평시 防産시설 활용과 戰時 병기 증산, 그리고 수출이 가능해진다>(吳源哲, 「한국형경제건설」 제7권)
 유신선포 직후인 1972년 12월28일에 상공부는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100억 달러 수출계획을 보고했다. 1980년에 100억 달러를 수출한다는 계획이었다. 朴대통령은 이 보고를 듣고는 『10월 유신에 대한 중간평가는 수출 100억 달러를 기한 내에 달성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그렇기 때문에 행정, 생산양식, 농민생활, 국민의 사고방식, 외교, 문교, 과학기술 등 정부의 모든 정책초점을 100억 달러 수출목표에 맞추어 총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스템 운영의 鬼才(귀재)」라고 불리는 朴대통령은 국정운영의 가장 중요한 목표를 수치화하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각 부서의 역할을 명백히 한 다음에 適材適所(적재적소)의 인사를 통해서 각각의 역량을 이 방향으로 집중시켜 놓고는 그 집행과정을 제도적으로 확인하고 점검하며 수정과 독려를 되풀이했다.
 朴대통령은 100억 달러 수출목표를 3년이나 단축해 1977년에 달성함으로써 이제는 1980년대의 國政 목표를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이 무렵 朴대통령은 1980년대의 비전으로서 國土改造(국토개조)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는 수도를 공주 부근으로 옮겨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완충하면서 국토이용의 효율성, 특히 物流의 편의를 극대화하는 국토개조를 생각하다가 「가로림 프로젝트」(공식명칭 「중부종합공업기지 기본구상」)라는 큰 그림을 그리게 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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