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의 대야망-이슬숲 프로젝트(2)
『임시행정수도를 만들자』
1977년 2월10일 朴대통령은 서울시청을 연두 순시해 市政(시정)을 보고받고 나서 몇 가지 지시한 뒤 약간 뜸을 들인 후 조용한 말투로 폭탄발언을 했다.
『서울의 근본문제는 인구가 느는 것을 어떻게 억제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잡음이 생길까 봐 이야기를 안 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통일이 될 때까지 임시행정수도를 만들어 옮겨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구체화된 것도 아니고, 위치가 결정된 것도 아닙니다.
서울에서 한 시간, 길어도 한 시간 반 정도면 오고 가고 할 수 있는 그러한 범위 내에서 인구 몇십만 명 되는 새로운 수도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인구 700만 명이 넘는 수도 서울이 휴전선과 너무 가깝게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장기적인 안목에서는 통일이 될 때까지 임시행정수도로서 독일의 본 같은 그런 수도를 만드는 것이 좋다는 구상을 한 것입니다.
수도 서울을 死守(사수)한다는 개념은 추호도 변함이 없습니다. 전쟁이 나면 대통령과 중요한 기관은 즉시 서울로 다시 올라와서 전쟁을 지도한다는 것만 국민들이 확실히 알면 심리적 동요는 없으리라고 믿습니다』
朴대통령이 행정수도 건설을 이야기한 것은 그보다 2년 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1975년 8월2일 진해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朴대통령은 기자들과 이야기하면서 보도금지를 전제로 말했다.
『수도권 인구분산 정책의 획기적인 방안은 수도를 옮기는 것밖에 없다. 정치·경제·문화는 서울에 두고 행정만 옮기는 것이다』
1975년 12월 朴대통령은 李經植(이경식) 경제1수석에게 「수도권 인구억제 정책」수립을 지시했다. 이 업무는 1976년 초 申炯植(신형식) 무임소 장관에게 넘어갔다. 申장관은 朴鳳煥(박봉환) 재무부 이재국장을 기획실장으로 영입해 이 업무를 맡겼다. 朴실장은 그해 3월 金秉麟(김병린)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을 불러 의견을 들었다. 金과장은 李經植 수석팀 밑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임시행정수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소신 있는 경제엘리트 관료로 정평이 나있던 朴실장은 그해 5월에 끝낸 「수도권 인구 재배치 기본구상」에 임시행정수도案을 집어넣었다.
한편 朴대통령은 1976년 6월, 그 전해에 총리직을 그만두고 쉬고 있던 金鍾泌씨를 불러 임시행정수도 계획을 세워 보도록 지시했다. 朴대통령은 「서울에서 두 시간 이내로, 가급적 금강변이며, 인구가 50만 명 정도인 행정수도 건설 계획을 짜보라」고 지침을 주었다.
金씨는 6월2일 서울大의 최상철, 주종원 교수를 청구동 자택으로 초대했다. 金 前 총리는 지도 한 장을 주면서 임시행정수도의 입지를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崔교수팀은 서울 타워호텔에서 3주간 비밀작업을 해 미니 차트를 만들어 金 前 총리를 통해서 6월22일 朴대통령에게 올렸다. 차트의 명칭은 「N.C(New Capital)」였다.
『백지계획을 짜라』
1976년 7월22일 申炯植 무임소 장관은 朴실장과 함께 대통령과 총리(崔圭夏) 이하 관계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수도권 인구 재배치 구상」을 보고했다. 이 보고에 임시행정수도 건설안이 들어 있었다. 대전·청주·조치원 삼각지대 인근에 인구 50만 명 규모의 행정수도를 만들되 통일 후에는 서울로 복귀한다는 것이었다. 朴대통령은 이 보고를 듣고 대단히 만족했다.
『이렇게 많은 대학과 대학생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는 것 아닌가. 실은 나도 2, 3년 전부터 저 문제를 생각했어요. 6·25가 끝난 뒤 저 정도의 자리에 새로운 수도를 만들어야 했어. 서울로 되돌아와 이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저 방법 외에 무슨 방법이 있어?』
그 한 달 뒤인 8월18일 朴대통령은 金載圭 건설부 장관과 김의원 국토계획국장을 불러 관련자료를 넘겨주고 입지기준을 제시하면서 행정수도건설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했다. 朴대통령이 직접 메모해 불러 준 임시행정수도 입지기준은 이러했다.
<휴전선을 고려할 것, 서울에서 두 시간 거리일 것, 경부선 주변 도로망이 좋은 곳일 것, 水源(수원) 확보가 용이할 것, 30분 내지 1시간 내에 기존 중심도시로 접근이 용이할 것, 優良(우량)농지가 적을 것, 排水(배수)가 좋고 낮은 구릉 야산지대일 것, 20~30분 거리에 비행장 건설이 가능할 것, 50만 명 정도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을 것, 문화재 등 기존 특수시설이 철거되지 아니할 것>
건설부는 보고서를 올리면서 朴대통령에게 『범국가적인 사업이니만큼 새로운 임시기구를 만들어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이상이 朴대통령의 연두 순시 공개 발언이 있기 전 진행상황이었다. 朴대통령의 발언으로 행정수도 건설 계획이 공개된 직후인 1977년 3월7일 朴鳳煥 실장은 朴대통령에게 「수도권 인구 재배치 기본계획안」을 올려 결재를 받음으로써 임시행정수도 건설은 국가기본계획으로 확정되었다. 朴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행정수도 건설에 관한 지침을 구체적으로 내렸다.
<첫째, 행정수도 건설은 아무리 빨라도 앞으로 10년, 혹은 그 이상이 걸릴 것이다. 국방력 증강 등 다른 중요사업 수행에 지장이 없도록 무리 없이 추진해 나가겠다.
둘째, 백지계획부터 수립한다. 작성기간은 2년 정도로 하되 청와대가 직접 담당한다.
셋째, 수도의 이전은 예산 범위 안에서 하나씩 하나씩 수행한다.
넷째, 백지계획 업무는 중화학공업기획단장 책임下에 추진토록 하며 오늘 수도권인구계획을 성안 보고한 朴실장이 기획단으로 옮겨 吳수석을 보좌하도록 한다>
방위산업 건설, 중화학공업 건설을 책임진 吳源哲 제2경제수석은 또 일복이 터진 것이었다. 그는 朴鳳煥씨를 중화학공업기획단 부단장으로 임명하고 그 밑에 10명의 실무기획팀을 구성했다.
결단을 망설이는 대통령
백지계획이란 立地를 생각하지 않고 이상적인 도시계획을 한 뒤에 행정도시가 들어설 곳이 확정되면 거기에 맞게 수정해 확정계획을 세우는 방식이다. 기획팀에 참여했던 金秉麟씨에 따르면 1977년 5월경에 吳源哲 수석이 충남 공주군 長崎面(장기면) 일대를 想定(상정)한 백지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장기면의 남쪽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북쪽에서 남동쪽으로 이 지역을 가르는 대교천이 금강으로 들어간다. 북쪽엔 국사봉, 남쪽엔 장군산이 있다. 서울의 북한산·남산·한강축과 비슷한 지형이다.
吳수석은 장기면의 동서 12km 구간을 행정도시 축으로 설정했는데, 이곳은 서울 청량리-신촌의 12km 축과 비슷했다. 언덕이 많고 농지는 적으며 低지대가 아니라서 適地(적지)란 것이었다. 金씨는 『이 지역의 남북 간격이 좁고 구릉지가 완만하지 않아 공사비가 많이 들며, 북쪽이 낮고 남쪽이 높아 문제가 있다』고 반대했으나 吳수석은 『많은 곳을 조사했으나 그만한 지역이 없다』고 했다. 盧武鉉 정부가 확정한 행정복합도시 입지는 吳源哲 팀이 想定(상정)했던 장기면과 일부 겹치되 동쪽으로 약 5km 밀려난 곳이다.
吳씨는 『풍수지리적으로도 우리가 정했던 곳이 낫다. 이번에 정한 곳은 低지대이고 지하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어 걱정이다』고 했다. 吳씨는 『朴대통령이 임시행정수도 건설이라고 했지만 청와대도 옮기는 사실상의 遷都(천도)였다』고 했다. 청와대가 들어갈 자리에는 경회루와 똑같은 연못도 마련했다고 한다.
―전쟁이 났을 때 먼 곳에서 지휘를 할 수 있습니까.
『전쟁 지휘소는 일선에서 떨어진 곳에 있어야 합니다. 서울이나 사령부가 일선 가까이에 있으면 敵을 유혹합니다. 서울을 기습해 포위한 다음 停戰(정전)하자고 제안하면 큰일 아닙니까. 땅굴도 서울이 가까우니까 뚫는 것이고. 수도가 대전이라면 뚫겠습니까』
吳수석에 따르면, 朴대통령은 백지계획이 거의 마무리될 때쯤인 1996년에 올림픽을 유치하기로 하고, 경기장을 계획도면에 집어넣도록 지시했었다고 한다. 吳源哲씨는 통일 이후에도 新행정수도가 통일한국의 수도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획을 짰다고 말했다.
『북한이 적화통일하면 평양이 수도가 되는 것이고, 자유통일을 하면 그대로 가는 거지요. 이유는 간단해요. 북한은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게 그쪽은 동해안도 서해안도 좋은 항구 자리가 없어요. 동해안은 수심이 너무 갑자기 깊어져서, 서해안은 얕아서 그렇죠. 북한은 통일이 되어도 좋은 항구가 있는 남한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쪽은 물건을 만들고 남한을 통해서 수출해야 할 운명이지요.
한국은 해양국가라는 원칙이 지리적으로 이미 나와 있습니다. 한반도는 어디까지나 남한이 중심입니다. 장기면이 내륙이라도 가로림만이 서울에 대한 인천 역할을 하는 거지요』
吳씨는 新행정수도 건설은 국민투표로 결정할 문제라 생각하고 그 준비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朴대통령이 결정을 미루는 것이었다. 장기면을 朴대통령이 시찰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입지를 공식적으로 결정하려 했는데 대통령은 움직이지 않았다. 朴대통령은 헬기로 국토개발 현장을 시찰하고 와선 『꼭 내가 그린 그림을 보는 것 같다』는 말을 할 만큼 건설과 토목에 취미가 있었다.
吳수석은 대통령이 유신체제와 1970년대의 宿願(숙원)이던 중화학공업 건설을 궤도에 올려놓은 다음엔 국토개조와 그 핵심인 遷都에 착수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吳씨는 「대통령을 했다는 것과 遷都를 했다는 것은 역사에 어느 쪽이 더 높게 평가되겠느냐」고 반문하면서 「그래서 朴대통령이 결정을 못 내리고 있다가 10·26 사건을 맞았다」고 보고 있다.
『수도분할은 후진의 길』
하나 흥미로운 것은 吳源哲 前 수석을 비롯해 행정수도 백지계획에 참여했던 사람들일수록 盧武鉉 정부의 遷都 계획과 그 뒤의 이른바 수도분할式 행정복합도시 건설에 부정적이란 점이다. 吳씨는 이렇게 말했다.
『행정기능을 분할해 일부만 옮긴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연방국가인 미국이 만약 행정부처를 각 州(주)에 나눠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행정기능 분할은 효율성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킵니다.
행정이란 것은 지휘소가 분명해야 카리스마가 생기고 명령에 따라 딱딱 움직입니다. 나눠 놓고 싸움만 한다면 일이 됩니까』
임시행정수도 실무팀에 근무했던 유원규(現 우정건설 부회장)씨는 이렇게 썼다.
<혹자는 행정수도는 충청권으로 옮기고 경제중심지로 계속 키워 나간다고 주장하지만, 미국과 같은 나라는 연방형 국가 운영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州정부가 자치권을 명실공히 행사하고 있어 政經분리가 잘 기능하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연방제도 아니고 地自體의 分權도 여의치 못하기 때문에 政經일치로 움직이고 있어 행정수도가 건설되면 경제도 옮겨 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도 서울은 최악의 상태로 되어 버릴 것이고, 신행정수도에 정부기능과 민간기능이 이전하면서 政經일치로 체계를 갖추는 상당기간은 혼돈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으니 이 기간 우리나라는 국제경쟁대열에서 뒤처지리라 예상된다>(「임시행정수도 백지계획은 살아 있다」. 해토 출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