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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성과 박상희
 황태성과 박상희
 
 청소년기의 박정희에 큰 영향을 끼친 셋째 형 박상희가 기자가 되 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1928년 6월8일자 동아일보의 사 고에서다. 여기서 그는 '동아일보 선산지국의 기자'로 발령을 받고 있다. 지국의 위치는 '경부선 구미역전'이라 되어 있다. 그가 24세때, 박정희가 열한 살로 보통학교 3학년 때였다. 박상희는 동아일보 기자 가 된 그해에 또 다시 일본 경찰에 끌려간다. 관련기사는 조선일보 1928년 11월11일자 5면에 '선산신간지회의 간부 4씨를 검속 - 검속한 내용은 절대 비밀'이란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경북 선산 경찰서에서는 지난 9일에 동아일보 지국 총무 김수호, 기자 박상희, 김종석 3씨와 밋당디 병원 의사 안중호씨를 돌연 검속 하였는데 이들 모두는 선산 신간지회 간부이더라'.
 
 1929년 4월19일자로 혼인신고된 박상희의 호적을 보면 그는 경북 김천의 양반가문 한양조씨 집안의 규수 조귀분을 아내로 맞고 있다. 조귀분은 큰딸 박영옥(69·자민련 명예총재 김종필의 부인)을 낳고 연이어 박계옥(62), 박화자(56), 박금자(작고), 박설자(53) 등 딸만 다섯을 낳은 뒤인 1947년에 유복자인 준홍을 보았다.
 
 조귀분의 조카딸 조길수(76)는 대구 신명여고를 다녔던 고모의 모 습을 기억하고 있다.
 
 '고모는 대구 신명학교까지 기차로 통학을 했습니다. 기차칸에서 고모부(박상희)를 만났다나 봅니다. 그 두 사람 사이를 엮어 준 사람 은 황태성씨였지요. 신명학교 다니던 고모는 김천 청년회관에 자주 나가면서 야학선생을 했고 이때 황태성씨를 알게 되었답니다.'.
 
 조귀분의 큰 아버지가 세운 김천 청년회관은 당시 무학자들을 불 러모아 한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조귀분의 집안은 김천에서 제법 재 산을 모았다. 부친이 고무신 가게와 포목상을 했고 두루마기와 조끼 를 만들어 파는 '조끼방'도 운영했다. 유지 집안의 딸답게 조귀분은 여장부였다.
 
 '고모는 신여성이었지요. 사람들 앞에 나서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를 정도로 힘차게 연설을 했어요. 연극도 했고요.'.
 
 당시 김천을 드나들던 박상희는 전국적 민족운동단체 신간회의 같 은 회원으로서 황태성과 교분을 쌓았다. 박상희는 선산의 핵심활동가 였고 황태성은 김천지역을 맡고 있었다. 다시 조길수의 회고.
 
 '황태성씨는 김천 의무면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부유한 집안이 어서 아들과 딸 모두 대구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황태성은 대구 계성 학교를 졸업했는데, 이 학교는 외국인이 세워 항일정신을 강조하기로 유명했습니다. 황태성, 박상희, 임종업, 박희수 같은 분들은 김천 경 찰서 고등계 형사들로부터 항상 주의를 받았지요.'.
 
 이때의 황태성과 박정희, 두 청년을 만난 사람이 있다. 재일거류 민단단장을 지낸 조영주이다. 선산이 고향인 그는 1986년에 기자에게 이런 증언을 남겼다.
 
 '나는 그때 일본에서 다치메이칸 대학과 교토 대학원에 다니면서 사회주의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방학 때 고향에 와서는 친구 인 박상희, 황태성과 자주 어울렸습니다. 사회주의 사상이 주로 화제 가 되었는데 박은 정열적이고 의분심이 강했으며 민족주의적인 데 반 해서 황은 냉철하고 코스모폴리탄적이었습니다. 황은 골수 사회주의 자가 될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박은 그러기에는 너무 가슴이 뜨겁고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난한 소작농출신, 신간회 활동, 사회주의자 친구… 박상희의 의 식은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이 결혼한 다 음 살림을 차린 곳은 구미 역 뒤편 각산이란 곳이었다. 버젓한 기와 집에 사랑채까지 딸린 건물이었다. 조귀분은 상모리 박정희의 생가에 갔다와서는 조카딸 조길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시집에 가 보니 정지(부엌)문은 가마니를 걸어 둔 것이 전부였고 사과궤짝으로 찬장을 하고 있지 뭐야. 시어머니(백남의)가 '신식 며 느리가 왔는데 부엌엔 들어 올 필요 없다'며 자꾸 방에 들어가라기에 이상했는데 알고 보니 쌀도 없고 간장도 없더라고. 시집이 그렇게 없 는 집인 줄 누가 알았겠노.'.
 
 박정희가 대통령시절에 쓴 수필 '나의 소년시절'에는 이 시절의 이야기가 나온다.
 
 '국민학교 3학년 하계 방학 때였다. 상희 형님이 처가인 김천을 가면서 나를 데리고 갔다. 산골에서 자라서 촌뜨기이기 때문에 김천 을 구경시켜주겠다는 형님의 선심이었다고 본다. 형님의 처가댁은 김 천시 황금정이었다. 하루는 형님과 같이 시내를 걸어가는데 아이스크 림 장수가 있어 형님이 그것을 사먹으라고 돈을 주었다. 고깔같이 생 긴 용기에 아이스크림을 담아 주는 것을 조그마한 목제 스푼으로 먹 었다.생전 처음 먹어보는 아이스크림 맛이다.
 
 먹다가 보니 형님은 자 꾸만 걸어가고 있었다. 빨리 먹고 형님을 따라 가려고 빨리빨리 먹다 가 아이스크림 용기가 깨어졌다. 나는 그릇은 주인에게 돌려주는 줄 만 알고 있었기에 깜짝 놀라 저기 걸어가고 있는 형님을 '형님'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형님, 이것이 깨어졌어요. 물어주어야겠어요'하 고 울상을 하고 당황하고 있으니 아이스크림 주인이 그 그릇도 같이 먹는 것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하기에 그때서야 아이스크림을 든 채 형님을 쫓아 따라갔다. 그날 저녁에 형님과 형수씨가 촌놈이라고 놀 려댔다.'.
 
 결혼한 뒤 박상희의 언론을 통한 민족운동은 계속된다. 1933년 1월14일자 조선일보 6면을 보면 박상희가 당시 조선일보 선산지국을 경영하면서 기사를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지방시론'이란 고 정란에 '선산지국 박상희'란 이름을 내 걸고 '의료기관 설립을 촉함' 이란 주장을 싣는다.
 
 '불충분한 시설이 많음은 하나 둘에 그치지 아니하겠지만 더욱 우 리 선산은 8만여 인구에 문화상으로나 교통상으로나 타군에 비해 별 로 손색이 없다. 그러나 오직 8만인 생명을 좌우하는 의료기관이 불 충분함은 기자가 귀중한 지면을 보도할 것 없이 각각이 더 잘 알 것 이다. 어느 방면으로 보든지 타군에 뒤떨어지지 않으나 의료계를 살 펴본다면 의식이 있는 현대인으로서는 한심함을 불금할 것이다.
 
 우리 선산의 의료기관이라고는 한의가 다소 있으나 신의라고는 선산읍에 조선인의 공의가 하나 개업하고 있을 뿐이다. 그 외에 장천, 구미에 한지의가 둘이 있으나 여러 가지 설비가 불완전하야 주민의 불만이 불소하다. 그러면 한지의까지 합하면 전군 8만여 민중이 주거하는 지 방에 의료기관이라고는 3개소뿐이니 약 2만7천인에 의사 한 사람이 평균이다.
 
 특히 구미로 말하면 경부선이 통한 소문화도시일 뿐 아니라 6백여 호란 주민이 살고 있는 지방에 50세가 넘은 일본사람의 한지의가 있 는 것도 여러가지 설비 불완전으로 주민의 적지 아니한 불평의 원인 이 되어있다. 위중한 병에 걸리면 안심하고 약 한 첩 사서 먹을 수도 없고 위급할 때는 김천이나 대구로 가지 않으면 구명할수가 없으니 문화가 발달된 금일에 있어서 전군민의 수치라 아니할 수 없다. 수치 일 뿐아니라 인도상 중대문제이라 할 수 있으니 하루 바삐 의료기관 증설을 절감하는 바이다(하략)'.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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