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사같은 기자 (2)
박정희가 보통학교 6학년으로 열네 살 되던 해, 막내 누님인 박재희는 열아홉의 나이로 상주의 한정봉에게 시집을 갔다. 한씨는 소년 시절에 일본에 건너가서 토목공사로 재산도 꽤 모은 사람이었다.
박재희는 훗날 며느리 선우민숙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상희 오빠가 한정봉씨를 소개시켜 주었단다. 정희 공부를 시키기 위해서라도 네가 희생 좀 해야겠다고 말했지, 그렇게 해서 시집을 갔는데 오빠가 시집까지 따라왔다가 돌아가면서 눈물을 훔치던 모습이 평생 잊혀지지 않는구나.'
당시 나이 마흔이었던 한정봉은 재력이 있어 그 뒤로 수십년 간 가난한 박정희를 뒷바라지해주게 된다. 박상희는 구미 보통 학교에 자주 들렀다. 교장 이시카와 고이치도 무던한 사람이었지만 박상희와 동년배였던 대구사범 출신의 박상만교사와는 특히 친하게 지냈다.
박교사는 박정희가 2학년 때 부임해 잠시 담임을 맡기도 했었다. 박상희는 박교사를 만날때마다 '우리 정희를 잘 좀 부탁하네'라며 신신당부했다. 박상만의 장남 박성호(65, 현 경북대학교 생물교육과 교수)는 선친으로부터 들었던 박정희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까무잡잡하고 작고 귀여운 아이였는데 집안이 너무 가난했답니다. 그런데도 공부를 아주 잘해 부친께서는 언제나 마음을 써주셨답니다. 당신의 도시락을 정희 소년에게 주신 적도 많고요.'
1920년에 개교한 구미공립보통학교는 박정희가 졸업한 1932년까지 대구사범학교에 단 한명의 합격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박정희에게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하도록 권한 사람들은 교장과 교사들이었다. 10년 전 기자와 만난 박재희는 이렇게 말했다. '상주에 살고 있는데 정희로부터 편지를 받았어요. 선생님이 시험을 치라고 하는데 어머님이 반대를 하신다는 겁니다.'
교장과 교사들이 정희 소년의 어머니를 찾아가서 '만약 집에서 반대하면 우리가 데려가서 시험을 치르도록 하겠다'고 강력하게 권했다.
어머니 백남의는 끼니때우기가 걱정인 집안형편으로는 박정희의 학비를 댈 수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시험마저 못치게 하면 막내의 가슴에 평생 한을 남기게 될 것 같아서 승낙했다. 그래놓고는 떨어지기를 빌었다고 한다. 박정희가 시험을 치르기 위해 대구로 떠나던 전날 밤에 있었던 다음 이야기는 박재희가 증언한 것으로 다분히 신화 적이다.
'어머님은 걱정이 되셔서 잠도 잘 주무시지 못하고 담배를 피우면서 바깥을 보고 있는데 집앞에 있는 대추나무 위에서 이상한 물체가 움직이고 있더랍니다. 자세히 살펴보고 있으니 큰 구렁이 두 마리가 나무를 기어 내려왔다가 올라갔다가 하고 있더랍니다. 어머니께서는 동희 오빠를 깨웠다고 해요. 한참 놀던 두 마리는 새벽 이 밝아오자 마당에 쌓아둔 장작더미 속으로 들어가버렸답니다. 이걸 보신 어머니는 '정희가 합격은 하겠는데 돈이 없으니 이걸 어쩌나' 하고 더욱 걱정을 하셨답니다.' 당시 농촌에서는 집에 있는 구렁이를 영물이라고 귀하게 여겼다.
우연이겠지만 박정희는 뱀띠이고 그의 날카로운 눈은 뱀눈이라고 불려지기도 했다. 사범학교 시험을 다른 학교보다도 일찍 특차로 치러졌다. 유만식(82. 전 김천여중교장)도 상주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박정희와 같은 날 대구 사범 입학시험에 응시했다.
'6학년에 올라와서는 매일 밤 늦게까지 학교에 남았습니다. 선생님들이 과외지도를 하셨지요. 각 반에서 5등 이내에 들어야 원서를 써 주었습니다. 우리 학교는 비교적 사범학교에 많은 학생들을 합격시켜 그 해에는 2개 반의 13명이 원서를 받아서 대구로 올라 갔습니다. 선생님들의 인솔하에 교과서와 공책들을 잔뜩 싸 짊어지고 상주에서 김천까지 경북선을 타고 가서 김천에서 경부선으로 갈아타고 대구에 내렸지요.
역전에 나오자마자 저는 5층짜리 공회당 건물에 기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까지 본 건물중 가장 높은 것이 3층이었거든요. 공회당은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벽돌이 까마득하ㅎ게 쌓여져 올라간 것을 올려다 보다가 그만 일행을 놓쳐 혼났지요. 논 두렁 길에 눈이 익은 저에게는 찻길은 또 왜 그렇게나 넓은지. 시험 사흘 전에 도착한 우리들에게 선배들은 예상문제를 만들어 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
박정희를 포함하여 구미보통학교에서는 일곱 명이 대구사범에 응시하게 되었다. 이들도 시험에 대 비하여 방과 후에 교사들로부터 특별지도를 받았다. 아마도 6학년 담임 김득명교사가 이들 소년을 인 솔하여 서울로 갔을 것이다. 필기시험 과목은 국어(일본어)1,2,3과 산술 1,2 및 국사, 지리, 이과, 조선어였다. 1차 시험이 끝난 이틀 뒤에 합격자 발표가 있었기 때문에 수험생들은 대구에 그대로 남아 있어야 했다. 발표 날 아침 게시판에 수험번호와 이름이 걸렸다. 떨어진 학생들은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고 합격한 학생들은 그날로 면접과 신체검사를 받은 뒤에 고향으로 내려갔다.
면접시험에서는 주로 『왜 사범학교에 진학하려는가』라는 질문이 대종을 이루었다. 대부분이 『훌륭한 교사가 되어 어린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국어(일본어)과목에서 각각 80점,40점,8점씩을 받았다.산술 제1은 만점인 1백점을 기록했고 제2는 40점을 받았다. 국사가 88점,지리가 50점,이과가 60점 그리고 조선어가 50점,그가 받은 총점은 5백16점으로서 응시생 8백85명, 그리고 합격자 1백명중 51등이었다. 1백명중 10명은 일본학생들이었다.
박정희는 1932년 4월8일에 대구사범에 입학하여 5년간 수학한 위에 1937년 3월25일에 졸업하였다.만 15세에서 20세에 걸친 인격형성기였다.만주사변(1931년)에서 시작된 일제의 군국주의적인 대륙침략정책이 중일전쟁 (1937)을 계기로 하여 드디어 중원으로 확산되던 시기와 일치한다.조선사람들을 이른바 충직한 「황민」 으로 개조하려는 정책이 적나라하게 진행되면서 민족혼을 담은 우리 말의 사용이 점차 제한되어가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황민화 교육의 첨병을 양성하는 것이 설치 목적이기도 했던 사범학교는 또한 군국주의 시대에 걸맞는 장교적 소양을 갖춘 교사를 양성한다는 목적도 갖고 있었다.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에 후진일본인들을 근대적 공민으로 교육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역점을,교사를 양성하는 사범학교 육성에 두었다. 좋은 시설과 우수인력 확보에 집중적인 투자를 했으며 공무원으로서의 교사들 대우도 잘해주었다. 일제시대에 가장 안정되고 존경받는 직업이 교사였다.
사범학교 교육내용도 지식보다는 인물 양성에 역점을 두었다.체육과 예능 및 군대식 교육에 많은 시간을 배당하는 전인교육과 기숙사제도를 시행하였다.사실상 준사관학교였다.구미보통학교 때 이미 군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박정희로서는 이 학교에서 자신의 소질을 검증할 수가 있게 되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유지되었던 박정희의 엄정한 무인적 자세를 이해하려면 그가 장교교육만 근 10면(사범학교 5년,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에서 약4년,조선경비사관학교에서 3개월)을 받았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흐트러짐이 없는 그의 단아한 자세는 이런 단련에서 우러나온 자연스런 몸가짐이었다. 그는 이런 교육을 통해서 한국의 일반문화,일본의 무사문화,중국의 한자문화를 골고루 섭취하였다. 박정희란 인물은 그런 점에서 동양3국의 문화가 함께 빚어낸 어떤 공동작품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