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사같은 기자 (1)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와 김천 규수 조귀분의 연을 맺게 해준 황태 성은 광복 뒤 월북하여 고관을 지내다가 5·16 직후에 김일성에 의하여 밀사로 남파되었다. 그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만나기 위하여 당시 김종필정보부장의 장모이던 조여사를 찾게 된다. 그는 결국 친구의 동생 에 의하여 사형에 처해지는 운명을 맞게 된다. 이 황태성에 관한 기록 을 찾아보았다.
1928년 2월26일자 조선일보. 황태성과의 인터뷰 기사가 나온다. 당시 경북내 유지들은 사재를 털어 무산아동을 위한 교육사업을 해왔는데, 경 상북도 당국이 그 중의 하나인 금릉군의 금릉학원을 폐쇄조치한 데 대해 서 황태성은 항변하고 있다.
'김천청년동맹위원 황태성씨담 : '금번 금릉학원 폐쇄처단은 경북도 당국의 독단적 처사가 아니고 김천에만 한한 국부적 문제가 아니오, 전 조선적 문제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면으로 김천 각 사회단체 및 김천 주민과 합력 항쟁하는 동시에 전 조선민중에 호소하야 정당한 해결을 얻고자 합니다.''.
조귀분의 조카딸 조길수는 황태성이 며칠 뒤 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고문끝에 초죽음이 되어 실려 나왔다고 기억한다. 박상희, 황태성, 박정 희, 이 세 사람은 사상대결의 시대에서 서로 꼬이는 인연을 맺게 된다. 박상희가 1928년에 동아일보 선산지국 기자가 되었다가 조선일보로 옮겨 선산지국을 운영하면서 기자역할도 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 전후부터로 추정된다. 이 기간에 그는 지역 청년회를 조직하고 신간회 활동에도 앞 장서고 있었다. 언론을 이용한 전형적인 민족운동가였다. 그는 사업수완 도 좋았다.
구미면에서 기와공장을 운영했고 19정보 가량의 산판을 사들여 목재를 부산 등지로 내다팔아 돈도 제법 벌었다. 언론과 이재, 사회활동에 두루 능숙한 그는 일본 경찰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성격이 괄괄한 박상 희는 그를 미행하던 고등계 순사에게 세숫대야 물을 뒤집어 씌운 적도 있었다.
1929년 11월3일에 발생한 광주학생운동은 신간회 운동의 기회이자 위 기였다. 광주학생시위는 1백94개 학교 5만4천여명의 학생들이 참가한 전 국적인 규모로 번졌다. 일본 경찰들이 일본인 학생들만을 옹호하자 전국 에서 1백50여 지회를 이끌던 신간회는 청년학생들을 상대로 주요도시마 다 강연회를 열고 여론을 자극하여 제2의 만세운동으로 유도해 나갈 계 획을 추진했다.
조병옥(1932-1933년 조선일보 전무 역임)을 비롯한 신간회의 중앙 간 부진들은 대규모 시위를 계획했는데, 이 계획서를 입수한 일제 경찰은 간부진들을 대거 검거한다. 한편 1928년 7월1일부터 9월1일까지 모스크 바에서 있었던 제6회 코민테른 대회에서 채택된 '식민지-반식민지 제국 에 있어서의 혁명운동에 관한 테제' 중 조선문제에 대한 언급에서 코민 테른은 신간회의 정당적 조직형태를 부정하고 '협의체적 공동전선'으로 의 개편을 요구한다. 이 '테제'에 따라 조선 공산당계열의 신간회 간부 진들은 기존의 연합체적 성격을 탈피해 계급투쟁적 조직으로 개변시킬 것을 주장했다. 이들은 사실상 신간회의 파괴를 의미하는 '해소운동'을 벌인다.
이 해소운동은 분열만 심화시켜 1931년 5월16일자로 신간회는 해체됨 으로써 민족운동역량의 커다란 손실을 빚게 되었다. 박상희는 박정희가 구미보통학교 6학년에 다닐 때 있었던 이 신간회 해산 이후에도 언론-민 족운동을 계속하였다.
대구 영남일보의 김진화가 1978년 10월에 간행한 '일제하 대구의 언 론연구'에도 박상희의 이름이 등장한다.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대구 지 국기자를 지낸 이선장은 신간회 대구지부의 핵심인물이었다. 그는 신간 회가 해산한 뒤에도 '대구청년동맹을 이활(시인 이륙사의 본명), 남만희 등과 함께 재조직하였고 1931년 가을에는 경북도내 각 군에서 신문지국 을 경영하거나 또는 통신을 맡은 사람들을 망라하여 보도협조망을 만들 었다'는 것이다.
이 보도협조망은 '특히 정치적인 면에서 서로가 연락을 긴밀하게 가지도록 하여 독립운동가들의 구속사건을 신속히 알림으로써 그 대책을 재빨리 강구하는데 많은 성과를 얻었다'고 한다. 이 보도협조 망은 경산, 안동 등 21개 지역의 기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선산지역 엔 '박상희, 최관호'가 들어 있다. '일제하 대구의 언론연구'에는 박상 희가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데도 관여하였다고 적혀 있다.
'박상희는 1934년 유정락씨가 경영하던 조선중앙일보 대구지국 기자 로 취임하여 활동하던 중 1935년 북경에서 입국한 윤명혁씨와 손을 잡고 조선일보 대구지국의 허병률씨와 함께 독립운동의 자금을 모금했다. 그 는 선산출신으로 대구에서 장사를 하던 김모씨에게서 3천원의 자금을 얻 어 윤씨에게 제공한 일이 있다. 이 사실은 이선장씨의 증언이다.'.
1992년에 작고한 박상희의 부인 조귀분이 생전에 조카딸 조길수(76) 에게 남긴 이야기는 구체적이다. 조귀분은 남편의 옷을 수시로 만들어야 했는데 그때마다 비밀 편지를 넣었다고 한다. 검문이 심해지면 양복 바 지단을 꿰맬 때 실에다가 일정한 간격으로 매듭을 지어 모르스 부호로 이용했다. 조길수의 남편 이서용(작고)은 평생을 철도국에서 근무해 지 방역장도 역임했다. 이서용이 모르스 부호를 이용해 전보치는 법을 박상 희에게 알려주었다. 이씨의 부인 조길수는 이렇게 기억한다.
'고모부는 남편에게 '이서방, 이거 봉천에서 박○○가 나오는데 전해 주게. 이서방, 이건 북경역에서 김○○가 나올 건데 전해 주게'라고 하 면서 편지를 건네주곤 했습니다. 당시 철도청에 근무하는 공무원들끼리 는 친했어요. 그들은 기차를 매개로 하는 가장 빠른 우편방법을 암암리 에 사용하고 있었거든요. 고모부는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에게까지 선이 닿았던 것으로 압니다.'.
박상희의 행동반경은 대단히 넓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족들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일본과 북경뿐 아니라 상해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취재도중 입수한 사진이 있다. 1935년4월20일 인천 월미도에서 찍은 것이다. 박상 희가 맨 앞줄에 나오는 이 사진 속의 한 인물이 들고 있는 깃발에는 '만 몽일보사'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1933년 8월25일 일제는 '국책적 견지 에서' 한글신문인 만몽일보(사장 이경재)를 신경에서 창간했다.
박상희 가 만주국 유일의 한글 친일신문이던 만몽일보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주 활동무대였던 경북에서 인천까지 올라와 함께 기념촬 영한 점이나 그가 중앙에 앉은 모습을 보아도 이 신문사 기자들과도 친 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박정희의 둘째형 박무희의 장남인 박재석은 상희 삼촌의 신문지국 일을 한동안 돕고 있었다. 1938 년부터 해방 직후까지 구미역전 중앙통에 있었던 지국사무실에서 일했던 박재석은 이렇게 증언한다.
'상희 삼촌은 외부활동을 하신다고 사무실에는 잘 계시지 않았습니다. 제가 배달, 수금도 하고 총무 노릇을 다 했지요. 일제말기에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문 등을 다 합쳐 운영했고 구미면에 나가는 부수도 1백∼ 2백부 수준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언론학자 정진석(한국 외국어대학교)교수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 가운 데 '매일신보사 사원명부'를 보면 박상희의 이름이 등장한다. 1939년 10월1일 현재 박상희는 매일신보 선산지국 구미분국의 분국장으로 기록 되어있다. 민족지 조선, 동아일보에서 일하던 박상희가 일제말기에 가서 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기자가 되었는지는 앞으로 밝혀야 할 과 제이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