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소리
박정희는 5학년 때 기숙사 북료2층6실에 배치되었다. 실장은 5학년 의 우등생인 이정찬, 박정희가 부실장, 그리고 후배들이 10명이었다. 방박닥은 다다미, 방 가운데 앉은뱅이 책상들을 붙여 놓아 자습하도록 하였다. 방 입구에는 숯을 쓰는 화로가 있었고 벽을 따라서 벽장이 있 어 사물을 보관하였다. 학생들은 머리를 책상, 다리를 벽장 아래로 뻗고 잤다.
밤마다 빈대와의 전쟁이 벌어지던 이 방에서 박정희와 함께 1년을 보낸 사람들 가운데 3년 후배인 7기생 두 사람이 생존해 있다. 최영복(전 경복고등학교 교장·79) 강응구(78·전 두계 초등학교 교장). 두 사람은 박정희를, '말이 적고, 늘 골똘한 생각에 빠져 있던, 당찬 선배'로 기억하고 있었다. 기숙사에서는 '가부시키'(주식)라는 풍습이 있었다. 저녁에 공부를 하다가 배가 출출해지면 한 사람이 10전씩 출 자하여 돈을 모은다.
그리고는 한 사람을 뽑아 기숙사 바깥으로 원정 을 보내 과자를 사오게 하는 것이다. 박정희는 기숙사비도 제때에 못 내고있을 때여서 '가부시키'에 낄 수가 없었다. 강응구의 기억에 따르 면 박정희는 '가부시키'이야기가 나오면 혼자서 슬그머니 나갔다가 일 이 끝난 뒤에 들어오곤 했다는 것이다. 보기가 안쓰러워 후배들은 박 정희가 있을 때는 '가부시키'이야기를 꺼내지 않게 되었다.
강응구는 박정희가 하도 말이 없어 한때는 어디 병이 있는 것이 아 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박정희의 특징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칫 솔질을 하는데 그때는 가루치분을 썼다. 박정희는 벽에 걸린 거울을 보면서 칫솔질을 매우 오래 하는 것이었다. 칫솔질을 하면서도 무슨 생각인지, 다짐인지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칫솔질이 끝나면 수건을 허리에 질끈 동여매고 세면장으로 향하는데 꼭 결투장으로 가는 사람 같아보였다. 박정희는 방과후에는 혼자서 별채건물의 음악교실 뒤로 가서는 권투 연습을 하기도 했다. 검도와 권투 연습을 자주 한 박정희 는 '아이구치'라고 불리는 작은 칼을 갖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는 강응구의 증언인데, 대구사범이 대구고보운동장에서 축구시합을 하 여 1대 0으로 대구고보에 이겼다. 응원나왔던 대구고보의 주먹들이 화 가 나서 대구사범 응원부대를 혼내주려고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 다. 이때 박정희가 붕대로 주먹을 감더니 아이구치를 꺼내고는 '한판 붙자'고 나서자 주먹들이 물러났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친구도 말도 별로없는 꼴찌 학생이었지만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힘은 완력과 침묵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결코 공격적인 학생은 아니었다. '남을 먼저 건드리지는 않겠 지만 상대방의 공격이 있으면 나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힘은 갖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슴도치 같은 학 생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고슴도치에 비유해 설명하기도 했었다. 우리나라는 남을 침략할 수 있는 힘은 없어도 되지만 강대국 이 먹으려고 할 때는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공격자세를 취할 만한 힘 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자주국방의 논리였다. 강소국을 지향했던 박정 희의 이런 자주국방 정책은 박정희의 인격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것으 로 보인다.
박정희가 5학년 때 어느 날 교정에서 눈을 치우던 동기생 주재정과 석광수가 말다툼을 벌였다. 주재정은 소녀처럼 얌전한 학생, 석광수는 제일 잘 나가는 주먹이었다. 석광수가 맥주병으로 주재정의 머리를 내 리쳤다.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때 박정희가 나서서 몽둥이로 석 광수의 다리를 때려주었다는 이야기가 신화처럼 전해지고 있는데 다소 과장이다. 박정희는 석광수를 때리지 않았고 말로써 나무라는 데 그쳤 던 것이다.
어쨌든 쬐끄만 박정희가 무서운 석광수와 맞섰다는 점에서 친구들 에게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기숙사에서 박정희는 실장인 동기생 이정찬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성격이 모진 박정희는 이정찬과 맞닿아 있는 자신의 책상을 일부러 떼 내어 다른쪽을 보면서 공부하기도 했다. 사감이 기숙사를 돌아다니다 가 이걸보고 지적을 하면 못마땅하다는듯이 다시 붙여놓는 것이었다.후 배 강응구는 어느 날 아무도 없는 방에서 이정찬과 박정희가 치고받을 듯이 권투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을 본 적도 있다. 이정찬은 5학년에서 는 최우등생이고 앨범 편집위원장 등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일꾼이었다.
동북고교 교장을 지내고 작고한 이정찬에 대한 동기생들의 평은 '빈틈이 없는 전형적인 교육자'이다. 이정찬이 책임을 지고 만든 제4기 생졸업앨범은 요사이의 앨범보다도 편집이나 사진의 질이 뛰어나다. 민 족정신과 정성이 스며 있는 앨범을 보노라면 왜 이런 학생을 박정희가 싫어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꼴찌 학생이 우등생에 대해서 느낀 열 등감 때문이었을까.
후배 강응구는 박정희가 기숙사 복도에서 자신에게 역사와 야사를 가끔 들려준 것을 기억하고 있다. 박정희는 역사 책을 많이 읽고 있었 다.
이 박정희에게 한번은 강응구가 수학교과서에 나온 방정식 문제를 좀 풀어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다. 박정희는 끙끙 대면서 문제를 풀었 는데 정답표와 대조하였더니 정답이었다. 박정희는 자신도 대견한듯이 기분이 매우 좋아져서 모처럼 웃음을 짓더라고 한다. 워낙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박정희라 활짝 웃어보인 그때의 기억이 오래 남았다.
박정희는 성적이 꼴찌권을 맴도는 바람에 한 달에 7원씩 나오는 관 비를 받을 수가 없었다. 당시 7원이면 대략 쌀 반 가마 값이었다. 반에 서 40등 이내에 드는 관비생들은 7원을 받으면 식비로 4원50전, 기타 공용으로 2원을 기숙사에 내야 했다. 기숙사의 운영은 학생들이 자치 적으로 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집에서 부쳐주는 식비를 기다리다가 늦 어지면 외상밥 또는 눈치밥을 먹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자존심이 강 한 그는 이럴 때면 고향인 상모리로 내려가버리는 것이었다. 박정희의 조카인 박재석(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장남)은 '월사금은 없고 돈 까지준다'는 대구사범에 다니는 삼촌이 시도 때도 없이 돈을 구하러 내 려와서는 며칠씩 놀다가 가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삼촌은 이불보 퉁이와 빨래감을 갖고 와서 어머니한테 맡겨놓고는 조선일보 선산지국 을 운영하던 박상희형 집을 찾아와서는 눌어붙는 것이었다. 박상희는 박재석을 불러들인 다음 손바닥만한 메모지에 글을 써주는 것이었다. '우리 조카를 보내는데 제 동생의 학비 후원 부탁드립니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다. 이런 메모를 가지고 박재석은 구미면장, 곡물검사소장 같 은 구미면내의 유지들을 찾아다녔다.
'그 분들은 일하다가 말고 제가 드린 쪽지를 읽으시고는 돈을 봉투에 넣어 건네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적게는 1원, 많게는 5원씩 주셨습니다. 저는 이 봉투들을 상희 삼촌에게 드리는데 그분은 열어볼 생각도 않고 서 '늬 아제 갖다 줘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분이 좋지는 않으셨 지요. 좀 골치아파했지요.'.
박정희의 상모리 친구들은 나팔소리를 듣고서 그가 왔다는 것을 알 곤 했다. 뒷동산에 올라 부르는 군용나팔소리. 그것은 가난과 꼴찌, 그 리고 일제의 억압에 찌들린 자신의 마음을 달래려는 하나의 몸부림이었 으리라.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