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아, 머리를 들 수가 없구나'
현준혁교사가 구속되어 학교를 떠난 이후 허전해진 학생들의 마음을 붙들어준 것은 김영기선생이었다. 부여 사람인 그는 조선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문학의 혼이 사라지지 않는 한 민족혼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었다. 시간마다 학생들에게 시조 백수를 골라 프린트를 해서 나누 어 주었다. 시조를 통해서 겨레의 영혼을 이어가려는 강의법이었다. 그는 우리 역사 강의도 곁들여서 했다. 조용한 성격인 김영기는 박정희의 4기생들을 가르치던 어느 날, 임진왜란과 이율곡의 10만 양병론을 설명 하다가 '나라가 이러니 어찌 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면서 한동안 흐느꼈다.
학생들도 따라 울었다. 박정희가 3학년일 때인 1934년4월에 또 독서사건이 터졌다. 1기 선배인 4학년생중 진두현 등 여섯 학생들이 독서회를 만들어 사회주의 책들을 읽다가 퇴학당한 뒤에 구속되었다.진 두현을 유치장에 집어넣으면서 조선인 형사가 말했다.
'현이란 새끼가 뿌린 씨앗은 참으로 놀랍구나. 그러나 이번만은 뿌 리째 뽑고 말 것이야.'.
이 말을 듣는 순간 진두현은 조선일보에서 읽은 칼럼 한 구절이 생 각났다는 것이다.
'조선사람은 감옥살이를 2∼3년 해야만 옳은 조선사람이 될 수 있다.'.
진두현은 '나도 이젠 옳은 조선사람이 되기 위한 수련으로써 옥살이 를 한다'는 각오를 다졌다는 것이다. 진두현은 당시 조선일보에 연재되 던 카프계열의 리얼리즘 문학 작품인 한설야의 '선풍시대'와 이기영의 '고향'을 매일 읽었다. 당시는 우리 지식인들이 민족주의보다도 사회주 의에 더 흥미를 느끼고 있을 때였다.
이 사건이 있은 지 한 달 뒤인 5월에 박정희는 3학년생들과 함께 금 강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철원에서 전철로 갈아타서 내금강 입구 미 휘리역에도착하니 태평여관에서 큰 기를 가지고 나와서 여행단을 환영 해주었다. 조선인이 경영하는 이 여관에서는 학생들을 정성 들여 모셨 다. 조선음식도 맛 있었고 잠자리도 쾌적했다. 다음날 내금강을 구경한 뒤에 도착한 곳은 일인이 경영하는 구미산장이었다.
일본인 주인의 대 접이 영 시원치 않았다. 1박3식에 돈은 태평여관보다도 세 배나 많은 2원을 받으면서 저녁은 맛 없는 일본식이교 잠자리는 흙바닥에 가마니 를 깔고 그 위에 재우는 것이었다. 화가 난 학생들은 내일 점심 도시락 은 이 여관 것으로는 먹고싶지 않으니 만들지 말고 식대는 돌려달라고 요구하였다.
일인 주인은 내일 도시락 반찬은 이미 준비하였으니 먹든지 안먹든 지 돈은 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조선인 학생들은 오기가 발동했 다.다 음 날 아침에 여관을 나설 때 여관에서 준비해둔 도시락을 아무 도 갖고가지 않는 것이었다. 일인 인솔교사가 '오늘 가는 길은 매우 험하다. 무슨 사고라도 나면 책임지지 않는다'면서 도시락을 가져갈 것 을 권해도 듣지 않았다.
학생들은 점심을 굶어가면서 외금강을 구경하 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인솔교사도 이 사건을 불문에 부쳤는 데 도리카이교장이 이를 알고는 철저한 조사를 지시했다. 정명모 정헌 욱 두 사람이 주동자로 몰려 퇴학을 당하고 유만식은 무기정학, 다른 일곱명은 1주간의 근신처분을 당했다. 학교에서는 이들 학생들의 부모 를 불렀다.
학생들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이틀 동안 이들 부모들은 복도 에서 대기해야 했다.
이 사건은 '금강산 비로봉 사건'으로 불린다. 박정희와 동기생인 이 정찬은 꼼꼼하고 빈틈없는 성격 그대로 이 금강산 여행중에 들르는 상 점과 공원관리사무소에서마다 기념도장을 받아와서는 스탬프집을 만들 었다. 여기에 친구들의 한 마디를 실었는데 유독 박정희가 쓴 글이 튄 다. 맞춤법을 오늘식으로 약간 고쳐서 소개한다.
'금강산 일만이천 봉, 너는 세계에 명산! / 아! 네 몸은 아름답고 삼엄함으로 천하에 일홈을 떨치는데 / 다같은 삼천리 강산에 사는 우리 들은 / 이같이 헐벗었으니 과연 너에 대하여 머리를 들 수가 없다 / 금 강산아, 우리도 분투하야 너와 함께 천하에 찬란하게…. 온정리에서 정 희씀'.
이 글은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박정희의 글 중에서는 가장 오래 된 것이다. 다른 동기생들은 '아! 평생에 보고싶던 우리 금강산이여! 이제 보고 나니 만시지탄이 없을 수 없네'식으로 자연을 자연으로 만보는데 박정희는 조국의 운명을 한탄하고 있다. 이는 말이 없고 생각이 많은 열일곱 학생의 마음속에서 중대한 문제의식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엿 보게 한다. 박정희를 '근대화 혁명가'로 만든 비범한 성격은 자신의 한 을 민족의 한과 한 덩어리로 파악한 점이다. 공동체가 아닌 자신의 한 만을 풀려고 했더라면 그는 이기적인 입신출세주의자의 길을 걸었을 것 이다.
박정희가 구미보통학교시절에도 특별히 정의감이 있는 소년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정의감이 가르쳐지는 것인지 타고나는 것인지에 대한 논란도 있을 것이다. 박정희는 그러나 대구사범에 와서는 정의감 이 강한 학생임을 엿보게 하는 몇 가지 흔적을 남기고 있다. 박정희가 5학년 때인 1936년에 발간된 '대구사범 교우회지' 제4호에 실린 박정희 의 시를 읽어본다.
'대자연 1. 정원에 피어난 / 아름다운 장미꽃보다도 / 황야의 한 구석에 수 줍게 피어 있는 / 이름 없는 한 송이 들꽃이 / 보다 기품있고 아름답다.
2. 아름답게 장식한 귀부인보다도 / 명예의 노예가 된 영웅보다도 / 태양을 등에 지고 대지를 일구는 농부가 / 보다 고귀하고 아름답다.
3. 하루를 지내더라도 저 태양처럼 / 하룻밤을 살더라도 저 파도처 럼 / 느긋하게, 한가하게 / 가는 날을 보내고 오는 날을 맞고싶다.이상'.
이 시를 한 일본기자에게 읽어보게 하였더니 '언어감각이 참 뛰어나고 순수한 마음이 들어 있다'고 놀라는 것이었다. '일본어의 운율도 잘 맞아떨어져 노래 가사 같다'고도 했다. 실제로도 박정희는 자신의 시에 다가 1, 2,3의 번호를 붙여놓아 그가 작사한 몇 가지 노래의 가사를 연상시킨다. 마지막에 '이상'이라고 써 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단정하게 딱끊어버리려는 마음이랄까. 여기에서도 끊고 맺는 것이 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박정희의 정신자세를 엿볼 수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다소곳하고 소박한 것에 대한 박정희의 동경이다.들 꽃과 농부로 상징되는 약자와 소박성, 거기에 대칭되는 귀부인과 영웅 사이에서 박정희는 약자편에 서겠다는 것을 이미 선언하고 있다. 박정 희가 죽을 때까지 유지해간 강자와 부자에 대한 반골의식과 소박성은 이미 대구사범 교정에서 틀이 잡히기 시작했던 것이다.(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