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  조선일보  |  독립신문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코나스넷  |  라이트뉴스  |  리버티헤럴드  |  뉴데일리  |  뉴스파인더
    
   


기사 확대  기사 축소  

사회주의자 현준혁교사
 사회주의자 현준혁교사
 
 현준혁 교사는 영어를 가르쳤지만 한글 교육에도 열심이었다. 그때 조선일보는 문맹퇴치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현준혁은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교재를 구해서 한국인 학생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민족은 무식한 사람이 많으니 한글을 배워서 신문 잡지라도 읽어야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알게 되고 그래야 우리같은 약소민족이 살아갈 수가 있다. 우리 학생 90명이 방학을 이용하여 한글보급운동을 하면 매년 9천명에게 글을 깨우쳐줄 수가 있을 것이다. 졸업 후에도 과외수업이나 방학을 이용하여 이렇게 하자.'.
 
 현준혁 교사는 영어를 가르칠 때 발음표를 반드시 한글로 썼다. 일 본인 학생들이 불평을 해도 무시해 버렸다. 그는 또 기숙사를 순시할 때는 일부러 일본학생들이 벗어놓은 게다짝을 발에 걸린다는 듯이 차 버리기도 했다. 한국학생들과 잡담을 나누는 척하면서 광주학생 사건 에 대해서 말해주기도 했다. 영어시간에는 학과와 관계가 없는 이순신 이야기를 꺼내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려고 했다. 2기생 김노계는 '대구사범심상과지'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제나라 역사를 배워보지 못했던 우리인 지라 우리는 현선생의 국사강의에 너나 할 것 없이 숨을 죽였고 눈시 울을 적시기도 했다. 비로소 내 조국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망국 의 설움과 함께 일본에 대한 강한 적개심이 북받쳐 올랐다.'.
 
 현준혁은 2학년에 들어가서는 우제동 학생 등 다섯 명을 조직책으 로 뽑아 점조직식으로 사회주의 서적 독서회인 사회과학연구회를 만들 었다. 이 조직의 목적은 '조선민족의 해방과 무산농민의 구제'였다.서 적은 오사카에 살고 있던 대구사범 자퇴생 부장환이 비밀리에 보내주 었다. 현준혁은 이 책들을 약 30명으로 불어난 독서회원들에게 나누어 주어 기숙사에서 소등후에 이불을 뒤집어쓴 채 손전등을 켜서 읽도록 하였다.
 
 그때 대구사범 학생들은 대구역에 나가서 만주로 북상하는 일본군 인들을 환송하곤 했다. 이 독서회 회원들은 그 자리에서는 침묵을 지 키고 일장기도 펴들지 않았다. 현준혁은 1931년 11월 1기생 신현필 등 학생 수명과 함께 구속되었다. 수사가 확대되어 1기생 중에서만 27명 이 구속되었다. 현교사와 다섯 명의 조직책은 구속기소되고 나머지 학 생들은 기소유예처분을 받고 풀려나왔으나 전원 퇴학당했다.
 
 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하여 우가키 총독이 학교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 직후 히라야마 교장은 전교생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연 설을 했는데 많은 조선인 학생들이 그것을 오래 기억했다.
 
 '학생제군들의 심정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나도 과거의 학 창시절을 회상하면서 말하노니 참고해주기 바란다. 내가 동경에서 일 고에 다닐 때는 명치유신 직후로서 벌족제도타파를 내건 문명개화운동 이 한 시대를 소란케 하고 있었다. 많은 학생들이 이에 호응하여 상아 탑을 뛰쳐나가 사회의 물결에 휩쓸렸다. 그들은 다시는 대학으로 돌아 오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의 일본문명을 쌓아올린 사람들은 그때 거리 로 뛰어나간 학생들이 아니라 상아탑을 고수한 학생들이라는 점을 제 군들은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현준혁이 주도한 독서회에 가입하였다가 퇴학당하였던 1기생 옥치 상 박준호는 '대구사범심상과지'에 실린 회상록에서 '현 선생을 지금 에 와서 단순한 공산주의자라고 보는 사람도 있으나 당시는 사회주의 와 민족주의가 공존하여야 하는 불가피한 관계에 있었고 3년간 그로부 터 공사석에서 계급투쟁에 대한 이야기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박정희 등 4회 동기생들이 기숙사에 처음 들어가서 놀란 것이 있었 다. 4학년이 된 1기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말을 놓지 않고 존대를 하는 것이었다.
 
 다른 학교에서는 선배가 후배에게 말을 놓는 것은 물론이고 예사로 기합을 넣고 구타를 하는데 대구사범에서는 선후배간의 인격존중이 전 통으로 정착되어 있었다. 박정희와 동기로서 같은 나팔수였던 이영원 (81세·서울 강동구 거여동 거주)은 '그런 전통은 아마도 현준혁 선생 이 지도하여 만들어놓은 것으로 추측되었다'고 했다. 이영원은 동기생 인 이정찬과 친하면서도 졸업할 때까지도 말을 놓지 않았다.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친밀하지 않은 사람이면 그가 청와대 보일러공이 라 해도 존대하는 말을 썼다. 인간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박정희의 특 징은 이런 학창생활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박정희보다 1기 선배인 3 기의 진두현에 따르면 현준혁은 첫 시간에 이런 당부를 하더라고 한다.
 
 '상급생이라고 하급생을 일본학교서처럼 기합줘서도 못쓰고 하급생 이라고 굴종해서도 못쓴다. 우리는 다같이 압박받고 있는 조선사람들 이야. 서로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현준혁은 사회주의자로서의 윤리에 철저하여 결혼도 아주 평등하게 했다.
 
 그는 고향의 무학처녀와 결혼했던 것이다. 현준혁은 치안유지법위 반으로 기소되어 징역3년에 집행유예5년을 선고받았다. 그가 조직한 독서회는 그 뒤로도 맥을 이어갔다. 박정희와 동기인 황용주(81세·경 기도 분당 거주·전 문화방송 사장)는 2학년 후학기에 현준혁계열의 독서회에 들어가 사회주의 책을 읽다가 기숙사 검색 때 발각되었다.퇴 학처분. 그는 고향인 밀양에 돌아왔다가 영어와 수학을 공부한 뒤 오 사카 중학교4학년에 편입하였다.
 
 이어서 와세다대학 불문과에 입학하였다. 홍종한(작고·전 수산개발공사 부사장)은 5학년 때 영국 사회 주의 저술가 H G 웰스가 쓴 '세계문화사대계'를 읽었다는 이유로 해서 퇴학을 당하였다. 이런 식으로 퇴학을 당한 4회생이 중퇴자 27명중 대 부분을 차지하였다. 박정희와 동기인 윤치두(작고·경북 영천시 교육 장 역임)는 생전에 이렇게 회고했다.
 
 '학교에서 보호자를 소환하면 그 학생은 영락없이 퇴학을 당한다. 그러면 고리짝을 짊어지고 밤에 보호자를 따라 학교를 떠나는데, 우리 는 한솥밥을 먹고 같이 뒹굴던 친구들이 그렇게 떠나는 것을 기숙사에 서 내려다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12회 이장환은 '대구사범심상과지'에 이렇게 썼다.
 
 '5년 동안이나 날마다 드나들던 연붉은 교문기둥에 노랗게 붙여져 있는 '관립대구사범 교'라는 동판 문패. 그 저편에 보이는, 본관현관 에 우거진 담쟁이 덩굴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푸르디 푸른 잎사귀로 뒤덮인 붉은 벽돌 교실에서 우리들은 자랐고 거기서 우리들은 뼈가 아 팠으며, 그 속에서 심상과는 서러웠었다. 청운의 꿈을 안고 그 어려웠 던 입학시험의 관문을 뚫은 총명한 눈동자에 거칠 것이 어디 있었겠느냐마는 식민지 치하의 현실은 냉혹했고 시대상황은 너무나 달랐던 것 이다.
 
 꿈은 깨어지고 바람은 거세었다. 대구사범 학교로 말미암아 거기 서 우리는 이민족을 만났고, 그것도 정복자 일본인으로 만났기에 서로 의 갈등과 충돌은 극심했었다. 압박받는 우리의 처지는 슬펐으며 슬픔 은 곧 저항으로 변해갔고 우리로 하여금 민족의 살길을 찾게 했다.'.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기사목록  프린트하기 

조선일보 | 스포츠조선 | 주간조선 | 소년조선 | 여성조선 | NK조선 | IT조선 | 잡지DB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 163 광화문 오피시아 1729호  |  대표자 : 조갑제  |  사업자등록번호 : 101-09-63091
상호 : 조갑제닷컴  |  개인정보관리 책임자 : 김동현  |  전화번호 : 02-722-9411~3  |  팩시밀리 : 02-722-9414 |
    개인정보취급방침

발행인 : 조갑제 | 편집인 : 조갑제 | 등록번호 : 서울아00945 | 등록일 : 2009/08/24 | 국민은행 360101-04-065553(예금주: 조갑제닷컴)
webmaster@chogabj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