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선생 기시와 대통령
박정희가 5학년일 때의 담임은 기시 요네사쿠였다. 수신, 공민과목을 담당했던 그는 당시 44세였다. 시즈오카 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는 1928년 대구사범에 부임하였다. 부드러운 학자의 분위기를 지닌 기시는 조선인 학생들 사이에서 호평을 많이 받던 일인 교사였다. 이른바 '대정 데모크 라시'를 호흡하면서 학창생활을 보낸 때문인지 그는 조선인 학생들을 인 격적으로 대하려고 애썼다. 김제여고교장을 거쳐 광복 뒤에 일본에 돌아 가서도 교육계서 일했던 그는 '유전 교육60년'이란 회고록을 남겼다. 이 책에서 그는 대구사범 교사 시절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기시가 대구사범에 부임했을 때 교장이 맨 처음 준 주의는 '조선인 학생들에게 절대로 '조센진'이란 말을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그는 반항 기 조선학생들의 싸늘한 눈초리를 대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했다.
'교육을 열심히 시키면 시킬 수록 교사의 의도와는 반대로 항일 이 일의 방향으로 빗나가고 순종이나 소박함을 잃어버리는 학생들을 보고는 식민지 교육의 어려움을 절감했다. 5·15사건, 국제연맹 탈퇴, 2·26사 건이 잇따르면서 생도에 대한 지도를 강화하라는 지침이 시달되었다. 교 사에게까지도 국민복에 전투모, 머리 짧게 깎기 등이 권장되었다.
현역 배속장교가 눈을 부라리는 분위기 아래서 교육은 지도에서 훈련으로, 훈 련에서 단련으로 엄격해져 가기만 했다. 학생들이 등교하고 없는 기숙사 를, 사감을 동원하여 뒤져서 사상관계책이나 조선어 노트를 조사하는 등 특고 경찰과 같은 행동도 있었다. 기숙사로 돌아온 학생들이 흩어진 책 들을 보고서 분노와 반항심을 가질 것은 당연했다'.
박정희의 성적표를 보면 하나 재미 있는 점이 발견된다. 5학년 때 담임교사 기시는 박정희의 품행 평가란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비워 두었 다. 1-4학년까지의 담임선생들은 '불활발'불성실'빈곤한듯' 식으로 나 쁜 평을 써넣었는데 기시만은 평가를 유보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꼴찌 권의 이 학생이 지닌 그릇이 간단치 않음을 알았을까. 기시는 1975년9월 에 대구사범 출신 제자들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달 26일오전, 그는 청와대로 초청되어 가서 집무실에서 왕년의 제자 박정희 를 만났다. 박정희는 스승을 반갑게 맞더니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하 고 일본어로 말문을 뗐다.
'70을 넘겼습니다.' '설마 그럴 리가요? 아주 젊게 보입니다. 사범학교 시절에는 올백을 한 머리가 새까만 선생님이셨는데.'.
대통령은 양해를 구했다.
'선생님, 저의 일본어는 이해하시기가 어려우실 것입니다. 관저에서 는 일본사람들을 공적으로 만나게 되므로 일본어를 쓰지 않습니다. 그러 나 일본어를 알아듣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으니까 안심하시고 말씀해 주 십시오.'.
기시가 들어보니 박정희의 일본어는 정확무비하였다. 그는 박정희와 의 대화에서 '일본육사에서 단련된 정확, 신속, 실천, 과감한 기풍을 느 낄수 있었다'는 것이다. 기시를 안내해온 대구사범 출신 인사 두 사람이 박대통령에게 한국말로 설명을 하는 바람에 잠시 기시는 대화에서 소외 되었다. 이를 눈치챈 대통령은 자연스럽게 다시 일본어로 대화를 이어갔 다.
기시는 '대담한 결단과 세심한 배려를 공유한' 지도자상을 느낄 수 있었다. 기시는 종전 후 미국이 일본에 이식시킨 6-3-3의 교육제도가 혼 란을 가져왔다고 불평을 했다. 그러면서 한국에 와 보니 건국의 이상이 초-중-고등 학교에 잘 침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어 감동했다고 말했 다. 대통령은 쓴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다음 세대에 기대를 걸고 교육에 힘쓰고 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 는군요. 대학에서는 되도 않는 옷차림에다가 장발과 엉터리 민주주의가 판을 치고 있어요. 무엇이든지 반대만 하려고 하니 어떻게 손을 써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30분이 지나서 기시가 일어서려고 했더니 대통령은 붙들었다.
'좀 더 말씀을 나누시죠. 비서관에게 지시해놓겠습니다.'.
대통령은 커피를 권하면서 담소를 계속했다. 기시가 붓글씨를 부탁하 자 대통령이 부끄럼을 타면서 극구 사양하는 것이었다.
'저는 원래 글씨가 나쁩니다. 선생님에게 드릴 만한 글씨를 쓸 수가 없으니 양해해 주십시오.'.
'무슨 말씀입니까. 대통령의 활력에 넘치는 글씨를 보고서 감탄했습 니다.' '어디서요?' '옛 대구사범을 찾았을 때 교장실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지금은 곤란합니다.선생님께서 일본으로 돌아가신 뒤 에 저도 연습을 해서 한 자 써보내겠습니다.'.
기시는 화제를 '일본문화의 뿌리'로 돌렸다. 중국문화가 한반도를 거 쳐 일본으로 건너간 과정에 대해서 설명하자 박정희는 인사치레의 말로 넘기고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일본에는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우수한 민족성의 기반이 있 습니다. 한반도에서 문화인과 기술자가 일본에 건너가서 정착하여 이들 이 또 독자적인 일본 문화를 만들었지요. 유교로 말할 것 같으면 본산인 중국에서는 쇠퇴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일시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했 지만 여기서도 형해화하고 말았고 유독 일본에서만 일본유학으로서 대성 하였습니다. 한국의 불교는 공자묘 등 각지에 형식상 남아 있기는 하지 만 본질은 이미 죽어버렸습니다. 대구사범시대에 배운 이야기 가운데 지 금도 잊지 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에도의 학숙에서 공맹의 가르침을 강론하는 자리에서 야마자키라는 사람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공자 맹자가 군대를 이끌고 일본을 침략해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제자들 은 대답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야마자키선생이 말하기를, '우리는 즉시 공맹을 맞아 싸워 그들을 포로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공맹의 가르 침이다'라고 했습니다. 학문이란 것은 이렇게 살려가지 않으면 안됩니 다.일본에서는 공자 맹자가 살아서 대성하였습니다.'.
박정희는 일본의 주체적인 외래사상 선별 수용과 한국의 사대적인 외 래사상 추종을 비교한 것이다. 50분이 지났다. 박대통령은 5학년때의 담 임 기시가 시간을 너무 빼앗는다고 미안해 하니까 '선생님 우리 나가서 기념사진이라도…'라고 했다. 집무실의 작은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니 초가을의 햇볕이 좋았다. 박정희는 관저를 삥 두르고 있는 국화 화분을 가리키면서 '저는 국화를 가장 좋아합니다. 지금은 국화의 계절, 일본의 국화도 아름답지요. 국화는 중국에서 건너왔다고 하는데 한국과 일본에 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박정희는 기시를 배 웅하기 위해서 본관 현관을 내려오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쿠데타의 지휘자로서 이 곳을 무혈점령한 제가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에서 운명의 불가사의를 느낍니다. 그러한 내가 언제 살해될지 모른다 는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제자의 담담한 술회에 기시는 입에는 차마 올리지못하고 생각만 하고 있던 말을 했다.
'영부인의 일은 참으로 애석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를 대신하여 그렇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기시는 작별을 고하고 돌아오는 차중에서 '바싹 마른 체구의 대통령, 그러한 그의 어디에 결사적인 우국의 투지가 숨어있는가 하고 깊은 생각 에 잠겼다'고 했다.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