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카와 중좌의 총애
1936년 5월7일 대구사범 육상대회에서 박정희는 8백m달리기 3조에 출 전하여 2등을 했다. 1등의 기록만 적혀 있는데 2분21초1. 그달 20일 박 정희를 포함한 5년생들은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그날 부산항에서 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항에 닿았다. 그들은 열이틀간 히로시마-오사 카-나라-도쿄-가마쿠라-닛코 등지를 돌아다녔다. 학생들이 가장 놀란 것 은 숲이었다. 이정찬의 일기 .
'5월21일 : 히로시마에서 오사카로. 수목이 울창하여 한층 원만한 빛 이 보인다. 이러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도 너그러운 것이다. 아카시 효고 오사카… 거의 한 도시처럼 붙어있다. 감격할 따름이다. 거칠어진 고향과 비교하여 이 얼마나 여유가 있는가.'.
영웅숭배의 기질이 있던 박정희는 아마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덤 이 있는 닛코의 동조궁에서 느낀 바가 있었을 것이다. 학생들은 도쿄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도 참배했다. 박정희 일행이 5월31일에 학교로 돌 아오자 기분나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숙사생 23명이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비상 방역체제였다. 6월29일부터는 5학년생들이 농촌학교 위탁 실습을 하게 되었다. 학생들이 농촌지역 보통학교에 가서 농사도 지어보 고 농촌의 문제점도 깨닫도록 한 것이었다. 우가키 조선총독은 사회주의 자들의 농촌침투를 막을 목적도 겸하여 농업진흥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일제는 교사들에게도 농촌지도의 임무를 부여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경 남 사천군에 있는 사남보통학교에 배치되었다.
그가 나중에 새마을운동 을 추진할 때 이 실습에서 많은 암시를 받았을 것이란 시각도 있다. 이 농촌실습은 7월12일까지 계속되었다. 7월18일에는 이와무라 시학관이 대 구사범에 와서 농촌진흥운동과 농촌갱생정책에 대해서 여섯 시간의 강연 을 했다. 7월20일 대구사범은 1학기 종업식을 갖고 여름방학에 들어갔다. 30분 간 기숙사 청소, 그리고 30분간 담임교사로부터 주의말씀을 들은 뒤에 학생들은 고향길에 올랐다. 박정희는 상모리에서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경기에서 금메달을 땄다는 소식에 접했을 것이다. 이정 찬의 일기에서 그때의 흥분을 느낄 수 있다.
'8월10일 : 올림픽에서 우리 선수들이 마라손에서 1,3등을 했다. 무엇 이라 축하해야 하나. 8월11일 : 싫증이 날 정도로 비가 내린다. 손기정 선수에 대한 호외는 계속 뿌려진다. 전국 방방곡곡 환희로 가득 찼다.라 디오에서는 이 군중을 보라, 수많은 환영군중 속에서 세계의 위인으로 지목되고 있다고 한다. 독일 총통 히틀러와 역사적 광경을 배경으로 악 수.'.
박정희는 8월22일 대구사범으로 돌아왔다. 여름방학이 끝난 것이다. 학우들은 모두 건재하였다. 기숙사의 빈대도 건재하였다. 22, 23일 밤, 북료6실의 동거생인 박정희와 열한 명의 학생들은 빈대와의 전쟁을 벌이 느라고 잠을 설쳤다. 실장인 이정찬은 일기에서 '대열을 지어 쳐들어오 는 빈대와의 싸움'이라 표현했다. 대구사범 4,5학년생들은 24일 대구80 연대에 입소했다. 지난해에 이은 2주간의 훈련이 시작되었다. 완전한 군 사훈련이었다.
25일 박정희는 새벽 5시반에 일어났다. 점호, 침상정리, 아침식사를 번개처럼 해치운 뒤에 7시반부터 훈련에 참여했다. 저녁 6시부터는 야간 연습이 있었다. 다음날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각개전투훈련을 받았다. 27 일에는 비가 내려 박정희는 실내에서 내무반근무요령에 대한 교육을 받 았다. 오후에는 사격예행연습을 했다. 이미 명사수로 정평이 나있던 박 정희에게 있어서는 즐거운 연습이었다. 저녁에는 학생들이 주보로 몰려 가 군것질을 했다. 단팥죽 한 그릇을 사먹기 위해서 한 시간을 기다리는 학생들도 있었다.
밤에는 폭풍우가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연병장에 나가니 죽은 참새 들이 뒹굴고 있었다. 그런 참새들을 주워모으니 세 양동이나 되었다. 오 전에 사격연습, 오후에는 사격, 밤에는 만화영화 상영이 있었다.
9월1일에는 대구사범의 교련주임인 아리카와(유천주일) 중좌가 '군인 칙유의 대요'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다음날에도 아리카와는 '스페 인 반란의 진상'이란 제목으로 강연했다. 이 아리카와 중좌는 육군사관 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장교였다. 직급이 정6위 훈4등(정육위 훈사등)으로서 교장 바로 아래였다. 그는 조선에서 활동하는 일본사람들 을 경멸하는 말들을 조선인 학생들 앞에서 노골적으로 했다. 일본인 교 사들도 아리카와를 두려워했다. 그는 조선인 학생들 사이에서는 의외로 인기가 있었다. 민족차별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아리카와는 박정 희를 '보쿠세이키, 보쿠세이키'라고 부르면서 귀여워했다.
총검술을 가 르칠 때는 박정희를 시범조교로 불러내었다. 박정희가 보여주는 모범동 작은 직업군인 수준이었다. 그의 차려자세는 말뚝을 박아놓은 것 같았다. 학과시간에는 빛을 보지 못했던 박정희이지만 교련시간만 되면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3학년 때는 소대장에 임명되기도 했고, 그 뒤에는 나팔수를 지원하였다.
9월30일은 추석이었다. 학교에서는 무슨 심술이 났는지 이날에도 학생 들을 쉬게 해주지 않았다. 오전엔 단기강습과정 수료식과 두 시간의 교 련이 있었다. 오후에는 기숙사의 대청소를 시키는 것이었다. 온건한 이 정찬까지도 일기장에다 '외출할 수 없도록 대청소를 시킨 것이 아닌가. 추석은 어디까지나 추석이다'고 불평했다. 10월19일 박정희는 학교부설 수성농장에 가서 벼베기 실습을 했다. 그날 저녁 사감회의에서는 9월분 기숙사비 미납자들에 대한 제재가 결정되었다.
오는 25일까지 미납상태 가 계속되는 학생은 집으로 가서 돈을 마련해 오라는 결정이었다. 며칠 뒤 박정희는 구미로 내려갔다. 올해 들어서만도 벌써 네 번째의 추방 같 은 귀향이었다. 그가 학교를 비운 사이 학생들은 학과 외의 일로 시달리 고 있었다. 10월24일부터는 교육칙어 제정기념주간 행사가 시작되었다. 첫날엔 칙어봉독식과 암송모임, 마직막 날인 30일에는 학생들이 5시반에 일어났다. 7시반까지 대구신사에 모여 참배하고 학교로 돌아와서는 또 국기게양식과 교장의 훈화.
이어서 교련.
11월12일에 박정희는 상모리에서 기숙사 실장인 이정찬이 보낸 엽서 를 받았다. 11월24일부터 기말시험이 있을 예정이니 빨리 돌아오라는 재 촉이었다. 며칠 뒤 박정희는 기숙사비를 마련하여 구미역을 떠났다. 박 정희는, 4학년 때는 73명 중 73등, 5학년때는 70명 중 69등이었으나 유 급은 되지 않았다. 시험을 한번도 빠지지 않고 다 쳤고 평균점수가 61점 이었기 때문이다.
5학년 때만 장기결석을 41일이나 하고도 이 정도 점수를 받았다는 것 은 그의 머리가 좋다는 증거가 되었다.
12월7일부터 박정희는 동급생들과 함께 대구수창보통학교에 교생으로 배치되어 교사실습을 하게 되었다. 다음날 오후에 기숙사로 돌아오니 수 색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정찬의 일기 .
'12월8일 : 오늘은 어두운 뒤에 돌아왔다. 도중 강습과생을 만났는데 기숙사에서는 무엇인지 시끄럽다. 우선 식당에 들어가 보니 친구들 중에 는 무엇무엇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럼 나도 하고 조사해 보았더니 저 '스크랩 북'이 없었다. 이코마 선생이 조사했다고 한다.
12월10일 : 저녁식사 후 교안을 만들고 있을 때 급사가 와서 기시 담 임선생이 부른다고 한다. 스크랩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무엇인가 있어 호출되고 있다. 그것은 3년 전의일이다. 그래도 효력이 있는지. 저 러한 것을 무엇인가의 증거로 보관이라도 하면 곤란하다. 내용보다도 표 면의 사안을 갖고 다스리려고 하니까.'.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