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  조선일보  |  독립신문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코나스넷  |  라이트뉴스  |  리버티헤럴드  |  뉴데일리  |  뉴스파인더
    
   


기사 확대  기사 축소  

억지 결혼
 억지 결혼
 
 대통령 박정희는 시도 쓰고 서예에도 능했으며 그림도 잘 그렸다. 운 동은 거의 만능이었고 노래를 작사, 작곡했다.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
 
 그는 균형감각을 가진 교양인이었다. 이런 인격의 틀이 잡힌 것은 대 구사범의 이른바 '사반교육'을 통해서였다. '사반'은 일본어로 읽으면 '사범'과 같은 '시항'이다. 대구사범 학생들은 '반쯤 죽이는 교육'이라 는 뜻에서 그렇게 불렀다. 우선 학과목이 엄청 많았다. 박정희의 성적표 를 보면 26개 과목이다. 이를 세분하면 38개 과목이 된다.
 
 수신, 교육원 리,교육사, 각과 교수법, 심리, 논리, 관리법, 교육연구, 법제경제, 국 어(일본어=강독 표출 습자), 조선어(강독 표출), 한문(강독 표출), 영어 (강독 표출), 지리, 역사, 수학(산술 대수 기하 삼각법), 박물,물리, 화 학, 농업(학과 실습), 상업, 공업, 도화, 수공, 음악, 체조(교련, 체조, 경기, 무도). 이 많은 과목을 소화하기 위해서 대구사범 학생들은 아침 6시에 일어나야 했다. 6시15분에 조례, 7시에 아침식사, 8시5분에 등교, 12시30분에 점심, 오후4시에 입욕, 오후6시에 저녁식사 후 밤9시30분까 지 기숙사에서 공부, 점호후 밤10시에 소등. 여름 방학 때는 2주일씩 대 구주둔 80연대에 들어가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3학기로 편성된 한 학년 과정에서 시험은 최소한 여섯 번.
 
 '반쯤 죽이는 교육'을 위한 시설은 60년 뒤인 요사이 우리 교실 형편 보다도 훨씬 나았다. 일제는 이 모든 교육을 실용정신에 입각하여 가르 쳤다. 실기, 실습, 실험 위주. 즉, '가르치려면 알아야 할 뿐 아니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수공실에서 대패질도 하고 농장에서는 농 사를 지었으며 연병장에서는 총검술, 음악실에선 바이올린도 켰다.
 
 '반 쯤 죽이는 교육'이 물론 정치적으로는 조선사람들의 혼을 빼앗아 충실한 황민으로 개조하기 위한 첨병을 양성하겠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런 교도의 자질을 갖춘 인격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덕체합일의 전인교육을 실시해야 했고 이것이 박정희형의 사람들을 배출한 것이다.
 
 대구사범의 황민화 교육은 실패했지만 전인교육은 성공했다. 신입생 들중 평균 약30%가 항일활동이나 사회주의서적을 읽은 이유로 퇴학을 당 하고 있었다는 것은 압제가 심한 만큼 반발도 거세진 것을 뜻한다. '반 쯤죽이는 교육'을 통해서 대구사범, 그리고 경성사범 평양사범 학생들이 자신들의 살과 뼈로서 받아들인 것은 동양적 가치관에 기초한 전인교육 이었다.
 
 이 일제 사범학교출신들이 광복 뒤 우리나라의 초등 중등 교육을 주 도하게 되었다. 이들이 길러낸 인재들이 박정희가 이끈 근대화혁명의 선 두에 서게 되었다. 단련된 교사들에 의하여 양성된 단련된 인력이 1960- 70년대의 한국사회를 밀어 올렸다.
 
 기자는 박정희가 이 5년을 어떻게 보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좋은 자 료를 얻을 수 있었다. 박정희와 동기생인 이정찬의 일기이다. 이정찬은 5학년 때는 박정희와 같은 2조(조=반)였을 뿐만 아니라 기숙사에서도 같 은 호실을 써 하루 24시간을 함께 했던 사람이다. 이정찬은 박정희보다 나이가 한 살 위였다. 청주에서 난 그는 열일곱 살이던 2학년때 고향 처 녀 정태인과 결혼하였다. 대구사범에서는 재학중 결혼을 못하게 하였으 나 박정희를 포함한 상당수 학생들은 부모들의 강권에 따라 방학을 이용 하여 몰래 결혼을 해놓고는 시치미를 딱 떼고 다녔다.
 
 이정찬은 서울 동 북고교 교장을 마지막으로 은퇴할 때까지 평생을 교육계에 바쳤다. 5년 전에 79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그의 대구사범 일기는 부인 정씨가 보존 하고 있다. 그의 일기에 나온 이정찬의 체험중 상당부분은 박정희의 체 험이기도 하다. 기자는 그의 일기중에서 동기생이자 기숙사 한 방 친구 인 박정희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가 싶어서 다 읽어보았다. 딱 한번 박정 희가 등장했다.
 
 '1936년11월10일(5학년 때): 오늘 아침은 4시에 일어났다. 그래서 청 소용구를 준비해서 대구신사에 모여 참배후 경내 미화작업을 하고 돌아 왔다. 방과 후에 또 작업을 하고 해가 서산에 기울어져서 해산했다. 박 군(박정희)이 돌아오지 않아 엽서를 띄웠다.(학기고사도 발표되었으니 까)'.
 
 북료6실의 동거생인 박정희가 기숙사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고향에 내 려간 뒤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2학기 기말고사 일정이 발표되어 연락을 취했다는 뜻이다. 박정희는 5학년 때 이런 일로 41일간이나 장기결석을 했으니 모범생인 이정찬의 눈에는 답답하게 보였을 것이다. 박정희가 5학년이었을 때의 이정찬 일기중에서 주요 대목을 뽑아 보았다.
 
 '*1936년2월27일: 동경에서는 무엇인가 시끄러운 게 있는 것 같은데 호외도 없으므로 무엇인지 모른다.
 
 *3월4일: '코노에 후미마로에게 대명이 내림'이라는 호외가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육군과의 관계는. 육군이 대단히 활발하게 움직이게 된 것처럼 보인다.
 
 *3월5일: 체육장을 일구고 있을 때 호외. 오늘 아침 신문에 의하면 코노에 공이 사임하고 히로타 외상이 총리대신이 되었다고 한다. 모두 들 의외라고 한다. 그 사람은 러시아에 정통하고 있다고 한다(편집자 주:이는 2월26일 도쿄에서 발생한 청년장교들의 쿠데타 기도를 가리킨 다. 이들은 곧 진압되었는데 박정희는 나중에 2·26사건을 연구하여 5·16거사 때 참고했다).
 
 *3월9일: 분열식 연습 이후 아리카와 중좌가 봉천전에 대하여 강화 를 했다.
 
 *3월25일: 종업식. 봄 방학시작.
 
 박정희는 봄방학 때 선산으로 내려가 4월1일에 세 살 아래인 열일 곱 처녀 김호남과 결혼식을 올렸다. 김호남은 선산군 도개면에 사는 선 산 김씨 김세호-이말렬부부 사이에서 난 4남매 가운데 큰딸이었다. 김 씨의 외가가 상모리 아랫 동네에서 살았는데 박성빈에게 김호남을 중매 했던 것이다. 김호남은 초등학교 과정을 가르치던 2년제 간이학교를 졸 업한, 키가 훤칠하고 잘 생긴 처녀였다. 박성빈이 막내 정희의 결혼 이 야기를 꺼냈을 때 장남 동희와 상희는 반대했다. 앓고 있던 박성빈은 생전에 막내가 결혼하는 것을 꼭 보아야겠다고 우겼다.
 
 박상희는 동생 이 졸업하여 교사로 취직을 했을 때 결혼을 시켜도 늦지 않다고 아버지 를 달랬으나 황소고집인 박성빈은 듣지 않고 화만 냈다. 일방적으로 혼인날짜까지 받아버렸다. 박정희는 펄펄 뛰었다. 혼인날짜는 다가오는 데 박정희가 집에 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박상희가 대구로 올라가서 박정희를 달랬다.
 
 상희형에게 잡혀오다시피하여 내려온 박정 희는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결혼식 날에 달아날 궁리'까지 했다('이 락선비망록'). 5학년 신학기가 시작되는 날 내키지 않은 결혼식을 올린 박정희는 아내를 상모리 오막살이에 데려다 놓고는 달아나다시피 대구 로 올라왔다. 다시 이정찬의 일기.
 
 '*4월1일: 1학기 시작. 5학년2조주임 선생은 키시 요네스쿠, 부주임은 고토 이사무 선생. 키시 선생은 '정진일로 내성심화'를 모토로 하여 마 지막 한해를 명랑하게 장식해보자고 독려.
 
 *4월2일: 오늘 밤 방바꿈이 있었다. 다행히도 북쪽 기숙사 6호실 - 조용한 곳에 배당되었다.
 
 *4월6일: 신입생 입학식. 밤에는 신입생을 위한 간단한 환영회를 열 었으나 사양하느라고 분위기가 어색했다. 그러나 너희들도 멀지 않아 여우가 될것이다.
 
 *4월18일: 주군의 조난에 대해서 전율을 느낀다. 현장은 보지 못했 지만 남산병원에 문병하러 갔다. 석군도 와 있었다. 원인이 어찌 됐든 사람 손의 흔적이!(주-얌전한 주재정의 머리를 석광수가 맥주병으로 때 린 사건. 주먹장이 석광수가 깨진 맥주병을 들고 설쳐도 겁먹은 동급생 들은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이때 박정희가 나서서 석광수를 호통쳐 흉기 를 버리게 함으로써 두고 두고 화제가 되었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기사목록  프린트하기 

조선일보 | 스포츠조선 | 주간조선 | 소년조선 | 여성조선 | NK조선 | IT조선 | 잡지DB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 163 광화문 오피시아 1729호  |  대표자 : 조갑제  |  사업자등록번호 : 101-09-63091
상호 : 조갑제닷컴  |  개인정보관리 책임자 : 김동현  |  전화번호 : 02-722-9411~3  |  팩시밀리 : 02-722-9414 |
    개인정보취급방침

발행인 : 조갑제 | 편집인 : 조갑제 | 등록번호 : 서울아00945 | 등록일 : 2009/08/24 | 국민은행 360101-04-065553(예금주: 조갑제닷컴)
webmaster@chogabj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