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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들
 좋은 사람들
 
 박정희 대통령은 1960년대 말 대구사범 동기생인 권상하 청와대 정보비서관에게 '기명유신'이란 붓글씨를 써보이더니 '이것 알지?'라 고 했다. 권비서관은 대구사범 한문시간에 염정권 선생이 시경에 나 오는 '주수구방 기명유신'이란 글을 써놓고 '주나라는 비록 오래 되 었지만 개혁으로써 천명을 새롭게 했다'고 가르치던 것이 생각났다.
 
 중국 서쪽 변두리의 한 작은 나라이던 주의 무왕이 백이와 숙제 의 소승적 의리론을 꺾고 군대를 일으켜 은의 주왕을 죽이고 왕조를 창시하여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한다. 하늘이 은에 내렸던 천명은 주 왕의 실정으로 주에 넘어갔다. 이것이 천명을 바꾼 행위, 즉 혁명이 다. 이 동양적 혁명논리에서 박정희는 5·16의 정통성을 모색하려 하 였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제2의 혁명'인 10월 유신의 정당성을 궁리 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치유신이란 말도 시경의 이 글에서 유래한다. 근대화를 위한 일 대 개혁을 '혁명'이라 부르자니 천황가가 단절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곤란했다. 오히려 오래된 나라 일본을 새롭게 탈바꿈시킨다는 의미에 서 '유신'이 적절한 표현이라고 본 것이다. 박정희도 정권 자체를 뒤 엎은 5·16거사는 혁명이라 불렀지만 1972년 10월17일의 조치는 정권 의 연속성을 유지시키면서 국가의 체질을 바꾼다는 점에서 '유신'이 라 호칭했던 것이다.
 
 혁명이라고 하면 많은 한국 지식인들은 루소 류 의, 자연법사상에 근거한 저항권으로서의 혁명을 생각하고 있었던 데 대해서 박정희는 동양정치사상에 기초한 혁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의 근대화 혁명은 주자학적 구질서의 잔재를 타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으나 그의 혁명사상은 대구사범에서 배운 동양적 전통과 문화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박정희는 피살되기 하루 전인 1979년 10월 25일 청와대 본관식당 에서 김용식 당시 주미대사 및 유혁인 정무제1수석과 오찬을 함께 한 뒤 정원으로 나오다가 잔디밭에 떨어진 오동잎을 하나 주워올렸다.그 는 아주 스산한 표정을 짓더니 한시의 한 구절을 읊었다. '섬돌 앞의 오동잎은 벌써 가을소리를 내는구나.'.
 
 이것도 대구사범 학생들이 염정권 선생한테서 배운 것이었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도다(소년이노 학난성) 잠깐의 시간인들 가볍게 할 수 있을 것인가(일촌광음 불가경) 연못가 방축의 풀은 아직 봄꿈을 깨지 못했는데 섬돌앞의 오동잎은 벌써가을 소리를 내는구나.
 
 경성제대 철학과를 나온 염정권은 열정적인 성격 그대로 한문 시 간에 인생관과 민족관에 관계된 한시와 고사, 그리고 문장들을 소개 해주면서 시간을 헛되이 쓰지말 것을 특히 강조했다. 박정희가 평생 동안 즐겨 인용한 도연명의 시도 염선생 시간에 배운 것이었다.
 
 '성년은 다시 오지 않고 / 하루에 새벽은 다시 없으니/ 때를 따 라 열심히 공부하여라 /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박정희가 외래사상이나 문화에 대해서 보여준 자주적인 자세의 출발점은 사물을 동양적 가치관으로 판단하려는 시각이었다. 그런 시 각의 바탕에 깔린 것은 그가 대구사범때 배웠던 한자문화의 교양이었 다. 그런 그가 한글전용을 강행함으로써 오늘날의 한국사회가 우리의 문화적,역사적 뿌리로부터 단절되는 상황을 만들었다는것은 흥미롭다.
 
 박정희의 대구사범 시절을 취재하면 할수록 기자는 그가 좋은 사람들, 향기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행운을 가졌음을 알게 되었 다. 좋은 교사와 좋은 친구들 사이에서 보낸 그의 5년은 정신세계를 기름지게 하였고 이것은 평생을 가는 그의 자산이 되었던 것이다.
 
 대구사범의 이런 분위기를 만든 것은 히라야마 마사시 초대교장 이었다. 박정희는 히라야마가 전출된 3학년 때까지 그의 수신과목 강 의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일본인들이 다니던 부산중학교 교장을 거 쳐 현재의 경복고 전신인 경성제2고보에서 만 8년간 교장으로 근무하 다가 대구사범에 왔었다. 도쿄 제일고등학교와 동경제대를 나온 히라 야마는 노일전쟁 때는 해군으로 참전하였다. 이시카와현 중학교 교장 을 거쳐서 우리나라에 온 뒤 그는 조선어를 배웠고 민족차별, 인간차 별을 하지 않았다.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인정과 애정을 깔고서 대했 기 때문에 거부감이 덜했다.
 
 1931년에 발생한 대구사범 현준혁 독서회 사건으로 수십명의 학 생들이 구속되고 퇴학당하여 자신도 곤경에 처했는데 히라야마는 한 번도 조선인 학생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는 구속된 현준혁을 자주 면회했다. 히라야마는 다만 학생들이 공부해야 할 시기에 사회운동에 참여하여 희생당하는 것은 인재의 낭비라는 것을 자신의 경험담을 인 용하여 역설할 뿐이었다.
 
 1기생 송남헌(85·전 통일원 고문)은 '히라야마 교장의 그런 충고 는 우리에게 분별력을 가져다 주었다'고 했다. '공부를 하여 실력을 쌓아야 진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는 자각이 생기더란 것이다.
 
 '실력만큼만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는 이런 현실주의자적 생각 은 박정희의 소신으로서도 굳어졌다. 박정희가 대구사범 이후 평생을 지켜간 행동원리는 '실력을 비축한 다음에 행동한다'는 것이었다. 그 는 말이 앞서는 것을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최후의 한 사람까지'식 선동적인 구호의 효용성을 믿지 않았다. 그는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실력을 준비하기전에는 수모도 참아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 는 또 이 실력을 총구에서 나오는 권력으로 정의하게 된다.
 
 히라야마교장에 대해서는 경성제2고보의 조선인 학생들도 많은 감 명을 받았다. '경복70년사'에는 이런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
 
 '1923년 9월 일본관동지방의 대지진으로 한국 교포가 많이 학살되 었을 때 이와무라 교유가 학생들을 모아놓고 '조선인들이 우물에다가 독약을 풀어넣고 하다니…'라고 했다. 히라야마 교장이 그 말을 가로 막고 교단에 오르더니 '아직 잘 조사되지 않은 일을 여기서 왈가왈부, 단정해서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해 박수를 받았다.'.
 
 히라야마 교장이 수신 시간에 박정희의 동기생(4기)들에게 가르 친 말 가운데 4기생들이면 누구나 외우고 있는 말은 '소인한가 위불 선'이다. 큰 체구에 온화한 노인 히라야마는 '소인은 한가하면 못된 짓을 하기 쉽다. 그러므로 항상 부지런히 면학에 힘써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내가 책임지고 가르치는 여러분은 소인잡배가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대인으로 교육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소인이면 한가해서 불선을 저지르지만 대인이면 한가하더라도 무엇인가 뚜렷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이 군자입니다. 여러분은 군자입니다.여러분들이 하 고싶은 것을 하십시오.'.
 
 한가함을 경계한 이런 가르침 또한 박정희에 의해 내면화된 것이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다. 박정희는 촌음의 시간도 허비하지 않는 습 관을 유지하였다. 그는 대통령 시절에 낮잠이나 조는 모습을 보인 적 이 없다. 친구 황용주(전 문화방송 사장)에 따르면 그는 노래하고 춤 추며 놀 때도 공부하듯이 진지하게 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메모, 일 기, 편지쓰기를 생활화한 사람이다. 취재중 보통학교의 제자들, 스승 들에게까지 보낸 그 수많은 박정희의 편지들을 접하다가 보면 대한민 국에서 가장 바빴을 사람이 이런 데까지 신경을 써가면서 글 쓸 시간 을 어떻게 쪼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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