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바람이 매섭게 살을 파고드는 동안은 사람들이 아무리 입으로 봄이 왔다고 떠들어도  몸과 마음 어느 쪽이든 봄이 아니 느껴지듯, 남이 써 준 미사여구의 연설문을 고개 푹 숙인 채 대독하듯이 높은 분들이 10년 만의 정권교체를 큰소리로 그러나 밋밋하게 선언했으나, 달력상으로는 어느새 봄여름도 지나고 가을이 다가오건만 이 시대의 제왕 텔레비전이 아직도 꽃샘바람을 쌩쌩 안방까지 불어제치는 한, 정권교체가 실감날 리 없다. 뒤늦게 멀리서 비수를 날려 메두사의 목 하나 뎅겅 날려 봐야, 머리카락 수만큼 많은 뱀 형상의 대가리 가운데 나머지는 여전히 생생하다. 언제든 새로 뿔이 돋듯 머리가 하나 더 돋아날 수도 있다. 그리하여 누구든 한 번이라도 메두사를 쳐다보면 그 자리서 돌덩어리가 되듯, 아직도 KBS든 MBC든 그 야심작을 쳐다보면 어린 백성들은 바로 머리가 돌처럼 단단해진다. 세뇌(洗腦)된다.

 지난 6개월은 6년처럼 긴 세월이었다. 정권교체의 출발선이었던 청계천을 가득 메운 것은 환호와 축복이 아니라 저주와 주문이었다. 결국 3개월간의 저주와 주문 살풀이 제1 마당은 무시무시 위력을 발휘하여, 뉴 라이트 정부는 우측 깜박이를 켜고 좌회전하고 한참 왼쪽으로 가는가 싶으면 갑자기 우측으로 꺾는다. 그러다가 다시 좌측으로! 아니, 우측으로! 이를 일러 실용이라 하고 민생이라 하고 강부자씨와 노숙자님의 뜨거운 화합이라 한다. 우리같이 아둔한 사람은 꼬부랑 영어도 아니건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다.  

 황후가 되어 나타난 딸 청이를 만난, 뺑덕어멈 남편 알거지 심 봉사처럼 두 눈이 번쩍 뜨이는 일이 어제 그제 연달아 일어났다. 그것은 북한주민의 수호천사 수잔 숄티가 서울평화상을 수상한다는 국제뉴스이고, 서푼짜리 오락영화들에게 앞자리를 줄줄이 빼앗겼던 '가슴촉촉' 영화 「크로싱」이 국내 모 영화제에서 8개의 상을 휩쓸었다는 거짓말 같은 참말이다. 북경올림픽에서 8개의 금메달을 딴 선수도 있지만, 메두사의 형형한 눈길에서 누구도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의 영화계에서 탈북자를 소재로 한 영화가 8개의 상을 목에 주렁주렁 걸었다는 것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김태균 감독은 이 시대의 페르세우스련가! 메두사를 아니 쳐다보고 거울 속의 이미지만으로 짐작하여 단숨에 메두사의 목을 뿌리째 잘라 버릴 이 시대의 페르세우스련가! 아니면, 그의 전령이련가!

 메두사의 돌덩어리 만들기 마력이 여전한 대한민국의 한복판에서 민족공조의 공동주연인 북한이 사방에 전기 철조망을 치고 보란 듯이 태연히 자행하는 인권유린 작태를 세상에 있는 그대로 알리기에 목숨을 건 한 미국인 선지자와, 탈북자의 실정을 20분의 1로 완화하여 일부나마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가 국내외 뉴스의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했다는 것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사실상 두 대통령이 존재하던 설날에 서해의 찬바람을 뚫고 대한민국의 품으로 찾아온 22명의 귀순자를 그 날로 바로 고향 앞으로 돌려보낸 게 6개월 전이 아닌 6년 전이던가. 3만리 머나먼 태국까지 걸어가서 기껏 감옥 아닌 감옥에 갇힌 탈북자 300여 명을 찔끔찔끔 외면한 것이 5개월 전이 아닌 5년 전이던가. 서해에서 대통령의 지엄한 무조건 전쟁회피 명령에 따라 열중쉬어하고 있던 대한민국의 이순신 후예들을 정조준으로 드르륵 갈겼듯이, 새 정부의 출범에 맞춰 새벽 산책에 나섰다가 저들이 제멋대로 그어놓은 금을 두어 발자국 벗어났다고 하여 세계 최빈국 북한에선 피보다 귀한 달러를 바리바리 싸 들고 간 동족을 정조준으로 땅땅땅 쓰러뜨린 날, 보고를 받고도 본 척 만 척 당신께서 비상한 머리로 햇볕정책의 묘용을 취임하자마자 깨달았는지 무조건적인 대화를 촉구한 것이 2개월 전이 아니고 2년 전이던가. 

 꽃샘바람이 아무리 세다 한들 오는 봄은 막을 수 없고, 메두사의 저주와 신통력이 아무리 대단한들 그리스의 수호신들로부터 빛처럼 빠른 신발과 뱀의 굴속까지 선명하게 비추는 거울과 바위도 두부처럼 자르는 칼로 무장한 용사 페르세우스를 당할 수는 없다. 수잔 숄티에게 인권상을 준 것은 서울평화상의 심사위원들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봄이다. 「크로싱」에게 8개의 금메달을 걸어 준 것은 춘사영화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수호신들이다.

 3백만을 굶겨 죽여 아낀 돈으로 만든 핵폭탄으로 김정일은 한국과 미국을 향하여 얼음! 헤헤, 얼음! 영어로는 Freeze! 심심하면 외쳐서 온갖 재미를 다 보았지만, 그것을 고철덩어리로 만드는 것은 6자회담도 아니고 북침도 아니다. 지구의 보안관 레이건이 과감한 SDI(Strategic Defense Initiative) 정책으로 '악의 제국'의 우두머리 고르바초프의 전쟁의지를 원천적으로 분쇄하여, 우주 정거장에서 레이저 광선으로 수만 기의 핵폭탄을 빛의 속도로 녹여 버릴 것도 없이 그로 하여금 무조건 항복하고 철의 장막을 걷게 했듯이, 북한인권의 실상을 이처럼 세상에 알리기만 하면, 60억과 5천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표창장과 그랑프리를 주면, 긴긴 잠에 빠져 있던 세상의 양심이 깨어나서 북핵은 절로 고철이 되거나 레이저 광선에 쏘여 녹아 버린다. 그러면 북한의 진짜 메두사는 자진(自盡)할 것이고 한국의 메두사 머리카락들도 거짓말처럼 풀풀 봄바람에 날려갈 것이다.  
                 (2008. 9.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