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의 통일지상주의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싹 변하여 판소리의 대가를 꿈꾸는 이가 거센 폭포에 맞서 목에서 피가 나도록 외치듯이 흡수통일의 거센 폭포를 향해 목이 쉬도록 '절대불가!'를 울부짖기 시작했다. 독일의 전격적인 자유평화통일을 보고 간과 쓸개가 한꺼번에 콩알만해진 것이다. 그로써 그들이 득의만면하게 들고 나와 밤낮 휘두르던 정의로운 통일세력과 사악한 분단세력이란 이분법의 칼이 얼마나 허구에 가득 찬 것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북한의 통일전선 전략에 따른 연방제통일은 가하나, 일시적으로 두 이념인 자유민주와 인민민주가 공존하다가 궁극적으로 인민민주로 통일되는 적화통일은 민심(여론조작의 결과)이 그렇다면 거부할 이유가 없으나, 대한민국의 헌법에 명시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따른 평화적 통일은 이념의 공존을 허용하지 않는 또 다른 독재체제이므로 결사적으로 반대한다는 얄팍한 속내가 드러난 것이다. 

 독일 통일의 일시적 후유증은 어제의 통일지상주의자에게 여론을 호도할 수 있는 호재였다. 천문학적인 통일비용, 옛 동독주민(오시 Ossi)과 옛 서독주민(베시 Wessi)의 갈등, 경기침체 등은 점진적 통일의 이점을 객관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로 줄기차게 제시되었다. 한반도 분단독재세력의 대표주자로 매도되었던 군 출신 대통령이 영원히 정계에서 사라지고 통일민주세력의 두 대표주자 중 한 명이 푸른 집에 들어가면서 어제의 통일지상주의자들은 콩알만해졌던 간과 쓸개가 단번에 배 밖으로 나올 만큼 커졌다. 머리보다 팔다리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최고 지도자가 됨으로써 뒤에서 조종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무슨 말도 하는 줄 모르고 튼튼한 팔다리를 흔들고 구르며 '이념보다 민족이 앞선다'는 말을 로마의 웅변가처럼 낭랑하게 읊음으로써, 흡수통일을 공식적으로 반대함과 동시에 자신은 절대 민족을 둘로 가르는 이념 지상론자, 분단세력이 아니라 이념을 초월하여 민족을 하나로 묶는 애국자, 통일세력을 자처했다.

 어떻게 계산하더라도 분단비용은 통일비용보다 크다며 재야에서 통일논의를 독점하던 자들이 하루아침에 쓸개를 다 떼어내고, 반세기 가난뱅이 동족에게 빵 몇 조각 주고 옷가지 몇 점 걸쳐 주고 우선 당장 비 피할 천막 몇 채 지어 주고 울퉁불퉁 도로와 흔들흔들 다리를 새로 놓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공장을 뜯어내고 최신식 공장을 대대적으로 짓는 걸 보고, 객관적 숫자를 내세워 그것이 얼마나 큰 돈인지 한국의 경제 규모와 비교해서 그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돈인지, 서독의 6분의 1밖에 안 되는 동독이 저러한데 한국의 2분의 1이나 되는 북한은 갑자기 통일하면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 거냐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머리보다 팔다리가 훌륭한 최고 지도자도 이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양비론적 물타기로 남북의 독재체제를 동급으로 놓고 북한의 공산독재도 비판하는 척 실은 한국의 독재체제를 독살스럽게 집중적으로 성토하면서 그것은 남북 공히 분단체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던 자들이 하루아침에 반세기 동안 거부되었던 자유와 평등을 꿈인 듯 생시인 듯 즐기는 옛 동독 주민의 넘치는 행복은 도외시하고 그들이 이제야 즐기는 그 자유와 평등을 반세기 동안 독재에 시달렸다는 한국은 이미 반세기 동안 공기인 양 조금도 고마운 줄 모르고 누렸다는 것은 꿈에도 인정하지 않고, 어제까지의 무조건 통일 신념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점진적 통일을 위해 못 살지만 자존심 강한 북한을 아무 전제 조건 없이 도와야 한다는 민족적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으로 동족의 얼음 가슴을 녹여 주자! 너그러운 형의 입장이 되자! 불쌍한 동생의 입장에서 생각하자! 좀 잘산다고 거들먹거리지 말자! (너희 수구보수는 아는가?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들이 우리보다 잘살았다는 것을! 시시각각 생존을 위협하는 외세에 맞서느라고 생존차원에서 경제보다 군사에 치중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을 따름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문제는 주한미군이다, 미국이다. 한 민족끼리 뭉쳐서 외세를 몰아내자! 그렇다, 이념보다 민족이 앞선다.)

 궤변의 달인들은 이런 황당무계 논리로 홍콩의 모 일간지가 빈정대었듯이 간첩 수만 명이 해도 못할 일을 정계와 학계와 문화계와 노조와 시민단체가 손에 손잡고 달성했다. 

 중국의 대학생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남북통일의 최대 훼방꾼 모택동을 존경한다고 밝힌 어느 대통령은 반미 좀 하면 어떠냐는 도발적인 말과 함께 북한의 혈맹 중국에게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졌다. 한반도에서 중국이 미국을 견제해 주면, 남북이 자주적으로 통일하여 옛날처럼 중국의 조공국으로 재편입하겠다는 신사대주의적 발상이었다. 한반도에서 미국과 중국의 균형자 역할을 자임하겠다는 중립 선언 내지 여차하면 자유민주의 대부 미국과 공산당 일당독재의 대모 중국의 노란 머리와 검은 머리에 동시에 꿀밤 한 대씩 먹일 수 있다는 초강대국 허세는 반미 좀 하겠다는 노골적 표현이었다. 

 1억 분의 1 위험 확률이 미국에서 비롯된 것이면 3개월 이상 백만 개의 촛불을 동시에 밝히지만, 10분의 1의 위험 확률이 중국에서 비롯된 것이면 단 한 시간도 단 한 개의 촛불도 감히 켜지 못하고 정경분리 원칙에 따라 오로지 물증과 이성으로 대하는 것이 정계의 일부 외에는 여전히 문화계와 학계와 노조와 시민단체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위선자(어미를 잡아먹는 청동대가리 살무사 copperhead)들이 주장하는 자주와 평화와 민족대단결의 원칙이다. 

 독일의 예에서 보듯이 대한민국 주도의 흡수통일에는 중국과 러시아와 북한의 헛된 꿈을 잠재우는 미국의 패도적 군사력이 필수적이다. 한미연합사령부를 한국과 더불어 한 마음 한 뜻으로 운영하기만 하면, 미국은 총 한 방 쏠 것도 없이 지긋이 북쪽을 노려보기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대한민국이 알아서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부터 시작하여 15년간에 걸쳐서 대한민국 안보의 둑 한미동맹이 사실상 균열되고 와해되면서 흡수통일은 오래 전에 물 건너 가 버렸다.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흡수통일에 대한 걱정은 북한이든 한국의 친북좌파든 전혀 하지 않는다. 흡수통일에 대한 논의는 2000년 6월 15일부터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주한미군이 바다를 통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외진 평택에서도 눈치보기 급급한 현재, 6자회담은 북한과 중국의 고래 잡기 미끼에 지나지 않는다. 핵무기로 무장한 북한을 겁주거나 달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는 중국이다. 한중일의 이해관계가 그렇게 지난 15년에 걸쳐서 조정되었다. 대한민국의 반세기 현대사에 몸서리치는 자들은 스스로 얼마나 큰 매국노 짓을 했는지조차 모른다. 역사를 몰라도 너무 모르고 중국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2천 년에 걸쳐서 한반도 외에는 주변의 모든 나라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여 소수민족의 민속촌으로 전락시킨 중국이 한반도에서 미국을 대신하게 되면, 핵무기를 관리한다며 느닷없이 중무장하고 압록강을 건너가서 북한에게 일시적으로 자치국의 지위를 주었다가 동남공정, 서북공정에 이어 동북공정을 완성할 것이 필연지사다.  

 흡수통일의 반대는 남북의 평화적 연합제 또는 연방제 통일이 아니라, 영구분단이다. 영토 욕심이 전혀 없는 자유민주의 나라 미국이 한반도에서 따돌림당하면, 국회의원 한 명 선거로 뽑지 못하는 공산당 일당독재의 나라이자 2천년 동아시아 패권국가 중국이 한 달만 송유관을 닫으면 포청천 앞에 놓인 작두에 길게 목을 내어놓을 조무래기 깡패의 동네를 냉큼 '중국의 지방왕국' 고구려의 옛 땅이라며 동북 제4성 조선자치령으로 만든다. 뒤늦게 한국이 길길이 뛰어 봤자, 천자의 나라가 외눈 하나 깜박할 리 없다. 불량 마늘 한 조각에 대한 항의조차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는 이상한 나라를 그들이 안중에 둘 리 없다. 신라처럼 대한민국이 이념이든 민족이든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중국과 죽기살기로 일전을 치르지 않고는 남북의 자유민주평화통일이 불가능할 것이다.    
        (2008. 10.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