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1년에 2백만 명 이상이 마음대로 만난다.
중국인은 가족상봉으로 장난치지 않는다. 중국과 대만은 가족상봉을 무제한 허용한다. 중국이 죽의 장막을 걷는 순간, 양안의 정상이 만난 적도 없고 거창한 공동성명이니, 기본합의서니, 공동선언이니 전세계에 요란하게 자랑한 적도 단 한 번 없지만,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이산 가족은 마음껏 만날 수 있게 되었다. 1년에 백 명이 아니라 2백만 명이 만나도 양안의 지도자는 절대 생색내지 않는다.

돈도 능력껏 들고 가서 사랑하는 가족에게 슬쩍 건네기도 하고 그리운 고향에 거드름 피우며 투자하기도 한다. 못 사는 대륙은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고 잘 사는 섬은 자본과 기술을 제공하여, 한쪽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돈을 만지고 다른 한쪽은 질 좋고 값싼 물건을 만들어 이문을 짭짤하게 남긴다. 한쪽은 거지가 되고 다른 한쪽은 보살이 되어 열등감과 우월감을 찢어 갖거나 한쪽은 강도가 되고 다른 한쪽은 피해자가 되어 웃음과 눈물을 베어 갖지 않는다.

중국은 천부인권인 가족상봉을 가로막은 것을 깊이 뉘우치고 말없이, 떠들지 않고, 조용히, 헤어졌던 가족이 무제한 만나게 해 주었다. 사과하라, 못하겠다, 앞으로 잘하겠다, 그걸 어떻게 믿느냐, 따위의 유치한 말장난을 하지 않았다. 그냥 슬그머니 대문만 따 주었다. 그 다음은 가족끼리 알아서 할 일이다. TV 나와서 울고불고, 한 자리서 100명이나 만나고, 공동회견하고, 다음 날 잠시 따로 만나고, 장군님 은혜에 감사하고, 햇볕정책에 감격하고, 이내 헤어지고 또 울고불고 ... 이런 따위의 유치한 짓거리를 하지 않았다.

하루가 아니라 한 달이든 두 달이든 신랑각시가 끌어안든지 말든지, 수절한 아내가 새 장가간 남편의 뺨을 할퀴든지 말든지, 한 쪽은 못 먹고 못 살아 팍삭 늙고 한 쪽은 잘 먹고 잘 살아서 살이 피둥피둥하니 올라서 아들이 아버지 같고 아버지가 아들 같아 서로 말을 높이든지 말든지, 그런 건 다 사생활이다. 사생활에 왜 국가가 끼어 드는가?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국가이다. 전세계 어디든 가지 못할 나라가 없다.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지상낙원' 빼고는 안 가는 데가 없다. 돈 있고 시간 있으면 못 갈 곳이 없다. 초등학생이 혼자 비행기 타고 태평양 건너 미국 가서 유학도 한다. 돈이 없어도 배낭 하나만 있으면 못 갈 곳이 없다. 가족 만나고 싶으면 언제든지 달려갈 수 있다. 휴대폰을 찍찍 누르면 언제 어디서나 그리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침대에서도 화장실에서도 그리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한밤중에도 새벽에도 그리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철의 장막만 거두면 한 달 안에 천만 명이 만날 수 있다. 왜 못 만나게 하는가? 통일도 누구 마음먹기라는데, 그까짓 일을 왜 못하게 하는가? 지상낙원이라면서 자랑하고 싶어도 어찌 가만있는가?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국가다. 청계천에 가 보고 싶으면 가보라. 동두천에 가보고 싶으면 가보라. 거기 거지가 들끓는지, 거기 허연 미군에게 새까만 아이들이 껌을 파는지, 성냥을 파는지 실컷 보라. 달동네, 가보고 싶으면 가보라. 시화호, 가보고 싶으면 가보라.

농촌, 가보고 싶으면 가보라. 거기에 소달구지가 있는지, 트랙터가 있는지, 자전거가 있는지, 자가용이 있는지, 가서 확인하라. 냉장고는 있는지, 세탁기는 있는지, 색떼레비는 있는지, 초저녁에 두 시간 깜박깜박 전깃불이 들어오는지, 하루종일 24시간 눈부시게 전깃불이 들어오는지, 그것도 확인하라. 컴퓨터도 있는지, 전자레인지도 있는지, 아궁이에 불을 때는지, 연탄을 때는지, 석유로 난방하는지, 가스로 난방을 하는지, 입식 부엌으로 개량했는지, 직접 확인하라. 이 모든 것에 대해 단 한 사람이라도 대통령 각하에게 단 한 번이나마 감사하는지 알아 보라. 농가부채가 얼마 되는지도 꼭 물어 보라. 좋은 것 나쁜 것 다 듣고 보라. 아무도 말리는 사람 없다.

포항제철도 가보고 삼성전자도 가보고 현대자동차도 가보라. 파업하는 회사도 있는 대로 찾아가 보라. 그 노동자들 중에 자가용 없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헤아려 보라. 샅바 싸움과 발성 연습에 여념 없는 국회도 가보라. 산에도 가보라. 거기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 그 나무를 임시로 심었는지, 진짜 자란 건지도 확인해 보라. 우린 숨기지 않는다. 가볼 것도 없다. TV만 보면 그런 것 신물이 나게 보여 준다.

대신에 지상낙원 좀 보여 주라. 제발 사람 귀찮게 따라다니지 말고 내버려 두라. 우린 그런 여행 안 좋아한다. 돌아다녀 보고 좋은지 안 좋은지는 스스로 판단할 거니까, 마음대로 돌아다니게만 해 주라. 걱정 말라. 수령님 동상도 구경하고 생가도 구경하고 김책제철소도 구경하겠다. 수용소가 있다는 요덕군에도 가겠다. 병원에도 가겠다. 유치원에도 가겠다. 지하철도 타보겠다. 지상낙원을 사진에 다 담아 세계에 자랑하겠다. 비디오에 담아 인터넷에 띄우겠다.

도대체 밝고 맑은 배달민족이 저 어둡고 흐린 한족보다 못할 게 뭔가. 인구 4천7백만에 국토면적 10만 제곱킬로미터밖에 안 되지만, 대한민국은 13억 인구에 960만 제곱킬로미터의 중국과 무역액이 비슷하다. 국내총생산이 중국의 반이나 된다. 경제만 대단한 게 아니다. 민주화도 월등히 앞선다. 지도자는 면장도 직접 선거로 뽑는다. 장기집권도 세습도 다 용인민속촌에서 드라마 촬영할 때나 구경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결단코 지상낙원은 아니지만, 날카로운 비판의 시퍼런 칼날 아래 희망과 사랑과 가슴앓이가 파릇파릇하게 솟아나는 땅이다. 드높은 찬양의 붉은 깃발 아래 절망과 증오와 한숨이 검붉은 피를 토하는 그런 무대가 아니다.

남북의 위정자여, 제발 흩어진 가족의 상봉으로 쇼 그만 하시라. 눈물 한 사발로 어찌 거대한 분노의 화산을 떠내려 보내겠는가. (2001. 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