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은 약장수 김용옥보다는 한 수 위다. 그는 약장수의 자화자찬 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캠브리지 교수 간판에 더하여 아시아의 경제개발을 긍정하는 신 케인즈학파의 당당한 목소리로 외국 특히 다른 나라 사람의 거품 웅변에 냉담하기 그지없는 영국인의 귀를 쫑긋하게 했으니까, 굳이 목에 힘 줄 것도 없고 헛기침으로 짐짓 목을 가다듬을 것도 없다. 눈에 띄는 머리모양이나 요상한 옷차림을 할 것도 없다. 그저 차분한 목소리에 매끈한 논리를 담고 쉬운 어휘와 풍부한 예증에 붓의 향기를 불어넣으면, 서울의 종이 값이 치솟는다. 이에 홀딱 반하여 조선일보가 세계적 경제학자를 VIP로 초대했다. 장하준의 제1성이 노무현이 부시와 2007년에 타결한 FTA의 국회비준 반대였다. 미국에 좋은 일만 시켜 준다며!
정운찬은 서울대 총장 간판으로 한때 민주당 대통령 후보 물망에 올랐다가 막상 국민이 멀뚱멀뚱 먼 산을 쳐다보자, 제풀에 낙백(落魄)하고 낙심(落心)하여 오르지도 않은 산 입구에서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나타났을 때는 옷 색깔이 노란 색에서 파란 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한나라당 출신 대통령이 총리로 내정하자, 그는 국가와 시대의 부름에 응하여 기꺼이 중도실용 방패로 나섰다. 민주당은 노골적으로 배신감을 나타내며 총리 후보의 도덕성과 무식을 폭로했다. 알고 보니, 뺀질뺀질 군대도 안 갔고 악랄한 일제(日帝)의 상징 731부대가 뭔지도 모르는 자였다. 체면 다 구겼지만, 그는 기어코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지위로 올라갔다.
계약직 가신은 보은의 일념으로 온 몸을 던져 주군을 방어했다. 전임 대통령은 ‘재미 좀 보았으니까’ 잘못된 것이든 잘된 것이든 일관성을 유지하여 나라는 동강냈지만, 특정 지역의 민심은 얻었다. 새 대통령은 ‘표 얻으려고 거짓말했으니까’ 거짓을 바로잡겠다며 뻔뻔하게 나라를 걱정했지만, 나라도 동강내고 특정지역의 민심도 잃었다. 돌팔매질과 화살 세례가 이윽고 기관단총 탄막과 다연장로켓포 우레로 바뀌자, 주군은 여유 있게 지하벙커로 숨었지만 총알받이 가신은 홀로 남아 나라를 걱정하며 맨몸으로 맞서다가 장렬히 산화했다.
정운찬이 다시 나타났다. 어제는 지역 이기주의를 질타하더니, 오늘은 대기업 승자독식을 개탄한다. 어제의 대기업 프렌들리(friendly) 대통령이 민주당의 산적(山賊) 막대기를 빌려 먼저 길가의 덤불을 후려쳤다.
“대기업이 현금을 쌓아 놓고 초고금리 사채놀이로 서민을 착취하다니!”
“단가 후려치고 기술 빼앗아 중소기업을 착취하다니!”
“기름 값이 묘하다.”
무슨무슨 위원장 정운찬은 우아하게 ‘이익공유제’를 주창했다.
16년간 벙어리 흉내 내던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직언의 단도를 던졌다.
“나는 그런 용어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사회주의 용어 아니면 공산주의 용어인 모양이다.”
그는 4부 능선에서 힘차게 정상으로 올라가던 김영삼 정권 시 ‘3류 발언’ 했다가 ‘얼음’ 신세가 된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정권이 6부 능선을 넘어섰다. 산이든 평지든 청와대에 5년간 전세든 양반은 정상에서 내려오는 중이거나 반환점을 돌았다. 삼성은 이제 16년 전의 2류에서 당대의 1류로 올라섰다.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3류고 정치는 여전히 4류다.
1970년대 설익은 원서 직수입 경제학 이론도, 1980년대 글로벌 기업의 건설 하도급 기업 실무 경험도 2010년대 1류 글로벌 기업 앞에서는 색이 바랠 수밖에 없다.
2010년 11월 국제표준화기구(ISO)는 10년간의 준비와 여론 수렴 끝에 포괄적인 사회책임(SR, Social Responsibility)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처음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을 표적으로 삼았지만,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대기업 중소기업 등 기업만이 아니라, 정부도 예외가 아니고 국회도 사법부도 예외가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노조도, 시민단체도 예외일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모든 조직(organization)은 사회적 책임이 있다! 어떤 조직도 면죄부를 받을 수 없다. 정부도, 국회도, 사법부도, 노조도, 학교도, 종교도, 시민단체도, 자선단체도 사회적 책임을 면죄 받을 수 없다. 지배구조, 인권, 환경, 투명성 등은 어느 조직이든지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청와대는 회전문 인사를 독점적으로 행사해도 되고, 노조는 각목과 돈으로 권력을 장악해도 되고, 법관은 전관예우를 받아도 되고, 종교는 독재자를 옹호해도 되고, 시민단체는 비밀 장부를 써도 되고, 인권단체는 북한인권을 외면해도 되고, 환경단체는 결과적으로 환경을 더 파괴해도 되고, 자선단체는 기부금을 삥땅해도 되는 게 아니다. 오물 덮어쓴 개는 입가에 밥풀 묻은 개를 나무랄 자격이 없다.
한국의 대기업이 문제점이 없지 않다. 많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공기업보다 낫고, 정부보다 낫고, 국회보다 낫고, 사법부보다 낫고, 학계보다 낫고, 종교보다 낫고, 노조보다 낫고, 시민단체보다 낫다. 게다가 세계가 하나의 시장이 되면서 한국의 대기업만이 아니라 전 세계 어떤 대기업이든 언제든지 망할 수 있다. 여차하면 대기업을 질타하는 다른 오물 투성이 영원무궁 조직과는 달리 시장이 외면하면 그 날로 끝이다.
장하준의 논리도 별 것 아니다. 박정희도 처음에는 그런 논리였다. 그러다가 박정희는 잘못을 깨닫고 1964년부터 소극적 개방이 아닌 적극적 개방으로 나아갔다. 다들 미쳤다고 아우성쳤다. 서울대의 조순도 그랬고 나중에는 정운찬도 그랬다. 장하준은 박정희의 적극적 개방은 인정한다. 그러나 노무현과 이명박의 적극적 개방 즉 선진국과 FTA 맺는 것은 반대한다. 그는 암기한 수준이지 이해한 수준이 아니다. 수출 1억 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던 당시에 비하면 지금은 훨씬 쉽다. 한국은 인구 3천만 이상의 국가에서 9번째 부자 나라다. 100개의 FTA와 100개의 외국어가 필요하다. 그러면 2050년경에 굳이 외국의 투자전문회사의 전망을 빌릴 것도 없이 인구 증가를 감안해 5천만 이상의 국가 중에서 세계 1위, 2위 선진국가가 될 수 있다. 한국인은 그만큼 적응력이 강하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환골탈태한 여러 대기업을 보라. 아직 초일류는 아니지만, 정부와 국회와 사법부만이 아니라 학계와 노조와 시민단체가 조금만 도와 주면, 최소한 발목만 잡지 않으면, 한국의 대기업은 중소기업과 손을 잡고 초일류로 나아갈 것이다. 자동차 부품 회사가 이제 외국으로 수출하는 것이 얼마인가. 일본이나 독일의 중소기업처럼 한국의 중소기업도 정부와 대기업이 돈이 아니라 기술과 경영 기법을 전수하면, 능히 세계로 뻗어갈 수 있다.
(2011. 3. 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