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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준 문화일보 논설위원

9·11 테러 한 달이 지난 2001년 10월 7일 오사마 빈 라덴은 비디오 성명을 통해 ‘오욕의 80년을 극복하기 위한 성전(聖戰)’이었다고 밝혔다. 당시 일부 전문가를 제외하고는 여기서 언급된 80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주목하지도 않았다.

그 의미는 이슬람국가(IS)가 2014년 6월 스스로 ‘칼리프 국가’로 규정하면서 명확해졌다. IS·알카에다 등 급진 이슬람주의 세력의 목표는 1924년 3월 폐지된 칼리프제의 복원이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대리인 혹은 후계자를 뜻하는 칼리프가 통치하는 신정(神政)일치 체제의 붕괴를 치욕으로 느끼고, 이를 회복하기 위해 투쟁한다는 것이다.

칼리프제는 터키 근대화의 아버지인 케말파샤에 의해 폐지됐다. 제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오스만 제국이 붕괴하자, 케말파샤가 술탄을 폐위시키고 터키 공화국을 건설하면서 없애 버린 것이다. ‘탈(脫)이슬람-입(入)유럽’을 추구한 케말파샤는 서구화된 엘리트 군을 중심으로 터키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저변을 장악하고 있는 이슬람 세력의 저항은 간단치 않았다.

이에 터키 군부는 자신을 ‘헌법의 수호자’로 규정한 헌법 조항을 만들고, 헌법 위기라고 판단할 때마다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갈아치우는 ‘무장한 헌법 재판관’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런 터키 군부의 역할은 한계에 달했다. 무엇보다도 군이 정치·경제 권력을 장악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문화적·지적(知的) 헤게모니는 이슬람 세력에 있어 왔기 때문이다. 또 경제 성장과 더불어 군부 체제에 싫증을 느끼는 중산층이 성장했다.

2003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의 집권은 터키사의 분수령이었다. 에르도안은 이슬람주의에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접목한 정의개발당(AKP) 노선을 통해 집권했는데, 군부의 정치 개입을 싫어하면서도 이슬람주의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던 대다수 터키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서구 사회민주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포기하면서 공산주의와 차별성을 만들어내 서구 민주주의의 주요 기둥으로 성장한 것과 같이, AKP의 온건 이슬람주의도 자유 민주주의의 일환이 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도 생겼다. 그러나 에르도안 집권이 장기화하면서 부패 스캔들과 언론탄압이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에르도안이 개헌을 한 뒤 2014년 대통령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 권한을 ‘칼리프 수준’으로 올리는 개헌을 다시 추진하고 있다.

이에 터키군은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군부 전체의 합의가 없었으며, SNS 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이 직접적 원인으로 보인다.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가 넘는 나라에선 군사 쿠데타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념적 헤게모니 없는 쿠데타는 21세기 터키 현실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번 쿠데타 진압을 민주주의 수호라고 평가하기엔 한계가 있어 보인다. 히틀러도 합법정부였다. 그리고 지금 많은 곳에서 포퓰리즘의 대두가 민주주의의 위협이 되고 있다. 미국·영국에서조차 걱정해야 할 판이다. 선거만으론 부족하다. ‘합리적이고 교양 있는 시민’이 전제돼야 민주주의도 뿌리내릴 수 있는 것이다. sjhw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