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점점 복잡다단해지면서 인간의 기대를 뛰어넘는 '돌발상황'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 심리학은 인간 개개인이 모두 다른 것 같지만 인간의 심리분석을 하면 일정한 패턴(patteern)이 존재한다고 보는 학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심리학과 관련된 책을 주로 읽는다. 한 가지 흥미로운 실험 사례를 소개할까 한다.



美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자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스가 1999년 실제로 했던 심리학 실험이 있다. 두 학자는 실험 참가들에게 검은 셔츠를 입은 세 명과 흰 셔츠를 입은 세 명의 학생들이 각각 팀을 이뤄 농구공을 패스하고 있는 실험 영상을 보여 주었다.

일 분이 채 되지 않는 이 영상을 보며 흰 셔츠 팀의 패스 횟수만 세는 것이 이 실험의 과제다. 실험 참가자들은 흰 셔츠 팀의 패스 횟수의 답을 제출했다. 그런데 진짜 과제는 따로 있었다. 이 영상에는 고릴라 옷을 입은 학생이 등장해 카메라 정면을 보고 가슴을 두드리고는 천천히 퇴장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고릴라를 보았는가 하는 게 진짜 과제였다.

실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실험 참가자들의 절반이 고릴라가 등장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고릴라를 놓치고 보지 못한 것이다. 결론은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것이다.

■ 美 해군사관학교 국가안보전략 교수 출신의 자카리 쇼어는 저서인 《Blunder》에서 럼스펠드 전 국방장관 재직시절 그의 참모로 활동했던 더글러스 페이스(유태계)와 관련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페이스는 미국의 對이라크전 당시 주요한 작전 계획을 수립했던 인물이다.

그는 당시 美 행정부 내에서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는 대표적인 관료였다. 大英제국의 흥망성회에 큰 관심을 가졌던 그의 집 서가에는 50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책들이 소장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역사책이다. 그런데도 페이스는 역사책이 올바른 판단을 대신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New Yorker'지의 제프리 골드버그와의 인터뷰에서 “한가지 풀지 못한 모순이 있다”면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어떤 지역에 관한 정보는 많을수록 큰 도움이 된다. 민족, 언어, 역사, 문화, 문학 등을 아는 것은 도움이 되지만, 그런 지식들이 그 지역을 통치하는데 올바른 전략이나 정책을 수립하도록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전문가이기 때문에 오히려 근본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다...(중략) 전문가의 의견이 좋은 것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전략과 정책을 입안하는데 있어 반드시 올바른 판단을 내리게 해주지는 않는다.”

■ 사회가 점점 복잡다단해지면서 인간의 기대를 뛰어넘는 '돌발상황'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공부하지 않으면 참으로 힘든 세상이다. 보행자를 친 운전자들은 ‘거기서 보행자가 튀어나올 줄 몰랐다’고 말한다. 의사가 수술도구를 환자 몸속에 넣고 꿰매는 바람에 환자가 폐색전을 일으켜 세 차례나 엑스레이를 찍은 사례도 있다. 수많은 의사들이 엑스레이를 들여다봤지만 저마다 자기 전공에 맞는 병인(病因)을 찾는 데 골몰하느라 정작 사진에 찍힌 수술도구를 놓쳐 버리게 된다.

심리학 책을 읽다보면 인간의 ‘착각’에도 종류가 다양하다. 훈련을 통해 지력을 몇 곱절 증대시킬 수 있다고 믿는 '잠재력 착각', '자기 능력을 과신하는 '자신감 착각', 모르면서 안다고 우기는 '지식 착각', 우연의 일치를 놓고 얼토당토않은 이론을 만들어내는 '원인 착각' 등이다.

참고로 자카리 쇼어 교수는 미국이 정치가, 정책분석가, 첩보전문가, 학자들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첩보기관과 첩보고문들을 갖추고도 이라크 문제를 잘못 파악하고 있었는가라는 의문은 두고두고 연구의 주제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방대한 역사적 선례들을 가지고 선례들을 가지고도 역사의 교훈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있다”면서 그 이유는 “우리의 사고방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경직’되어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관련 글] 美 CIA의 정보 분석 실패사례: 《Legacy of Ashes》

“이들은 기존의 세계관에 맞춰 세상을 한 번 걸러낸다. 그들의 필터(filter)가 당신의 필터와 같다면 당신은 그들을 좋아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을 싫어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그들을 통해 정보를 얻으려는 게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확인받으려는 것이다.” (데이비드 맥레이니, ‘착각의 심리학’에서)

국내 모 정보기관에서 오랜 동안 분석관 생활을 마치고, 학문에 뜻을 두어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모 대학에서 기업정보 수집 및 안보 관련 강의를 하는 A교수의 이야기이다. 일반인들의 경우 영화와 뉴스 등을 통해 美 정보기관, 특히 CIA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적어도 對北정보, 특히 인간정보(HUMINT)에 관한한 한국의 정보기관이 미국 정보기관을 능가한다는 것이 A교수의 견해이다. 일례로 그는 김일성이 1994년 7월 사망하자 미국의 CIA 고위 관계자들이 비밀리에 방한 해 국내 정보기관과 의견교환을 했다고 한다.

당시 한국 정보기관은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이 갑작스럽게 붕괴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미 내부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고 한다. 반면 CIA 관계자들은 “독재국가에서 독재자가 사망했기 때문에 북한이 6개월을 넘기지 못할 것으로 본다”는 의견을 내놓았다고 한다.

당시 현직에 있던 A교수는 ‘무슨 정보 분석을 저렇게 하나’하면서 CIA의 분석이 틀린 것을 알았지만, 동맹국 정보기관 요원들의 분석이었기 때문에, 면전에서 반박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CIA는 9·11 테러 직후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가 있다’고 백악관에 보고했다. 물론 이 정보는 이후 완전히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CIA는 중공군 개입을 막판까지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중공·북한군에 밀려 아군이 부산까지 내려간 뒤에는, CIA 요원이 실수로 부산 영도 앞바다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사살할 뻔 했다. CIA 요원이 비밀리에 한국인 북파 공작원을 수천 명을 훈련시키는 해역에서 李 대통령이 사전 통보 없이 뱃놀이를 했기 때문이다.

CIA는 한때 인간정보 수집을 등한시하며 첨단기술로 방향을 틀어 수십 억 달러에 달하는 첩보 위성과 도청 장치를 개발했다. 그 결과 소련과 동독 고위층의 사정을 파악하는데 실패하여 舊소련 해체와 베를린 장벽 붕괴를 막판까지 예측하지 못했다.

특히 CIA가 역사적인 두 사건의 예측을 실패한 내용은 국가정보학 등의 학문에서 자세히 다뤄지며 두고두고 씹히고 있다. 참고로 정보기관의 정보분석관들은 정보보고서를 작성할 때 ‘A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거의 단정적으로 말한 뒤, 이에 대한 주석을 달아 ‘아니라는 전문가도 있다’는 식으로 자신들의 설명책임을 벗어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이것도 결국 먹고사니즘의 문제인가?

김필재 spooner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