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개월간 이어진 소위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이후 결집하는 태극기 세력을 본 뒤 든 생각은 ‘과연 박근혜만큼 연민을 끌어낼 대통령이 나올 수 있을까, 보수라는 타이틀을 들고나오는 대통령 중에 과연 있을까’였다.

11일 서울 청계광장과 대한문 앞에서 열린 태극기 집회를 둘러봤다. 청계광장 집회에 참석한 김문수 前 경기도지사는 “8년간 박 대통령과 함께 정치를 했는데 그만큼 깨끗한 정치인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어 “현재까지 공개된 특검과 헌재, 청문회 자료를 모두 검토해봤으나 박근혜가 뇌물을 받았다는 증언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역시 깨끗한 정치인”이라고 했다. 언론은 김 지사 등의 태극기 집회 참여와 관련, “親朴 정치인이 세 결집을 하고 있다”고 보도한다. 그는 대표적 非朴 의원이었는데 언제부터 親朴으로 분류됐는지 잘 모르겠다.

서울시청 광장에 걸린 각종 현수막 중 다수는 언론과 특검, 그리고 야당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중엔 ‘울지 마세요 박근혜 대통령님’ ‘돌아오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등도 쉽게 볼 수 있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부터 힘차게 태극기를 흔들고 구호를 외치는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집회에 모였다.

아마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한 대통령에 대해 이러한 그리움(?)과 애정(?)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집단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이러한 이유로 ‘노사모’ 혹은 ‘박사모’라는 용어가 탄생했는지도 모른다. ‘이명박을 사랑하는 모임’이라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12월 ‘청와대의 딸’이라는 칼럼을 통해 최순실 사태를 ‘그리스 비극’에 비교했다. 칼럼 일부를 소개한다.

<朴 대통령의 추락은 신속하고 스펙타클했다. 박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는 데 일조한 시위대의 승리감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의 추락에는 무언가 신기한 점이 있다. 박 대통령의 이야기는 ‘그리스 비극’에 필요한 모든 요소, 즉 결함이 많지만 어떻게 보면 존중을 받을 점도 많은 한 사람의 추락과 고뇌라는 요소를 갖추고 있다. 한 가지 빠진 점이 있다면 군중의 연민(憐憫)이다.>

위 칼럼이 나온 12월과 현재 상황은 많이 바뀌었다. 일부 ‘양심 언론인’을 통해 이번 사건의 실체가 조금씩이나마 드러나고 있으며 ‘양심 법조인’을 통해 탄핵의 위법성이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계기로 태극기 집회는 촛불 세력에 버금가는, 어쩌면 더욱 커진 것으로 보인다. 언론과 특검, 야당의 최근 행태로 인해 비로소 군중의 연민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한 50대 여성 집회 참가자는 내게 태극기를 건네며 “젊은층이 깨어나야 한다. 안 그러면 베트남같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이미 태극기가 있다며 쭈뼛쭈뼛하자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남편으로 보이는 남성이 그녀를 제지했다. 돌아서는 그녀의 표정에서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베트남처럼 된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태극기 집회를 둘러본 뒤 촛불 집회로 향했다. 탄핵안 가결 이후 잠잠해졌던 시위대는 최근 탄핵 인용이 확실하지 않다는 불안감을 느낀 문재인 前 대표 등의 발언을 통해 再집결하기 시작했다. 구호는 과거와 비교해 과격해졌다. ‘하야가 민심이다’, ‘적폐청산’, ‘황교안이 박근혜다’ 등이 기억에 남는다. ‘노동자의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자’는 구호를 외치는 연사(演士)도 있다. 박 대통령 국정농단(?)과 노동자의 인권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촛불과 태극기 세력의 가장 큰 차이는 현 상황을 보는 인식 차이일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소위 ‘세대 간 갈등’을 예로 들며 촛불과 태극기 집회 모두 이제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양비론을 펼치는 정치인과 언론사 社說이 늘어나고 있다.

태극기 집회에 참석하는 젊은층이 늘어나고는 있지만 촛불 세력과 비교하면 현저히 적다. 촛불 집회에 참석한 젊은층은 ‘적폐청산’과 ‘친일청산’, ‘재벌도 공범이다’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들은 일제시대 혹은 친일파의 惡行을 직접 경험하지도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부터 박근혜 대통령까지 내려오는 소위 ‘적폐(積幣)’를 청산해야 한다는데 박정희 시대를 살아보지도 않았다.

반면 태극기 집회에는 박정희 시대를 경험한 중장년층이 대다수였다. 그 시대를 살아본 사람은 그때를 그리워하는데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시기를 ‘적폐’의 시작으로 보고 있었다. 또 이러한 중장년층이 세뇌당한 세력이고 박정희를 존경하는 마음에 딸인 박근혜 대통령을 무조건 두둔한다고 卑下(비하)한다.

태극기 집회 참석자를 두고 일부 언론에선 동원된 인원이 대다수라고 보도했다. 실제로 최근 서울 시내 한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던 중 한 30대 남성 두 명의 얘기를 엿들었다. 이 둘은 “태극기 집회에 참석해 4시간만 고생하면 일당 몇 만원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어 “우리도 나가볼까”라며 농담조로 말했다.

태극기 집회에도 촛불 집회와 마찬가지로 동원된 인력이 없을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11일 모인 사람 대다수는 ‘목욕을 하고 집회에 참석하면 돈을 더 받는 노숙자’도 아니었고 ‘맹신적 박사모’도 아니었다. 집회 현장에서 판매되는 태극기와 도서 등을 제 지갑을 꺼내 구매하는, 동네에서 흔히 보이는 시민들이었다. 과거와 달리 고등학생 정도로 돼 보이는 자녀와 함께 나온 부모의 모습도 많이 보였다.

요즘 또래 친구들을 만나면 정치 얘기하는 것을 모두 꺼린다. 지난해 촛불집회에 참석하던 친구들도 “이젠 그냥 어떻게 되든 좋으니 빨리 결정이 났으면 좋겠다”라고 한다. 탄핵에 반대하는 친구들은 여전히 정치성향을 밝히지 않고 대화의 주제를 바꾸자고 한다. 하지만 두 부류 모두 헌재의 판결에 어느 쪽도 쉽게 승복하지 않을 것이란 점에선 의견을 같이했다.

나를 포함한 이러한 세대가 30년 후엔 중장년층이 돼 이 국가의 기성세대가 된다. 촛불세력이 말한 대로 세상이 바뀐다면 ‘재벌해체’ 구호에 따라 30년 후엔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도 사라질지 모른다. 지금 촛불을 들었던 젊은층이 중장년이 되면 소위 ‘민주투사’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닐지도 모른다. “내가 30년 전 역사를 바꾸는 데 일조했다”며 후배 세대 앞에서 거드름을 피울지도 모른다.

태극기 집회에 나갔던 젊은층은 적폐의 대상으로 기록될 것이다. 부모세대에 세뇌돼 무능한 박근혜를 아무런 이유 없이 좋아한 세력이 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만큼 미움도 많이 받지만 동시에 이 정도 사랑을 받는 대통령이 다시 나올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러한 대통령이 있는 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역사는 이번 사건을 어떻게 기억할까. ‘적폐를 청산한 21세기 최고의 민주화운동’으로 기억될까, 아니면 ‘언론의 난(亂)을 이겨낸 한국의 민주주의’로 기억될까.

문제는 진실이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증거가 차고 넘쳐난다”고 검찰은 자부했으나 현재 야당은 특검의 수사 기간 연장을 주장하고 있다. 11일 촛불 시위에는 ‘2월 탄핵’이라는 플래카드도 등장했다. ‘특검 연장’과 ‘2월 탄핵’이라는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다.

태극기 집회 참가자와 촛불 집회 참가자 모두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는 것 같았다. 헌재의 판결에 한 쪽은 승복하지 못할 것이다. 국민 분열의 책임자를 처벌해야 하지만 이와 관련해서도 국민 여론은 엇갈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대한민국이 이 정도의 국민 분열로 무너질 취약한 국가가 아니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