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나 이성으로 판단할 때 나는 분명히 보증인이 되어 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내면에 있는 어떤 존재가 나를 말렸었다. 어떤 근거나 이유가 없는 직감이었다. 삶의 곳곳은 지뢰밭이었다. 25년 전쯤의 일이다. 사업을 하는 고교 동창이 찾아와서 보증을 부탁했다. 괜찮은 친구라고 생각했었다. 적극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인품이었다. 보증을 해 주려는 순간 마음 깊은 속에서 어떤 존재가 표현할 수 없는 찜찜한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 그에게 보증서를 받으려는 은행의 담당직원이 마음에 걸렸다.​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뭔지 모르지만 미소 짓는 이면에 여우꼬리가 보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간곡히 보증을 거절하면서 대신 돈을 꾸어주었다. 나 대신 증권회사 지점장을 하던 다른 친구가 보증을 서 주었다. 얼마 후 보증을 부탁하던 친구는 부도를 내고 외국으로 가버렸다. 몇 년 후 그의 늙은 노모가 나의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왔다. 외아들 때문에 전 재산을 날리고 이제는 묵을 방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

​그리고는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일산에서 그의 보증을 서 주었던 증권회사 지점장을 하는 친구를 만났다. 그가 부탁했던 보증은 알고보니 한도가 없는 포괄보증이었다고 했다. 빚이 수십억이 되고 보니 갚을 수도 없고 직장에 있을 수도 없었다고 했다.​

증권회사 지점장을 그만두어도 목에 단단히 걸린 멍에는 풀 수 없더라는 것이다. 이십여 년 간 가족과 함께 채권추심회사의 추적을 피해 도망을 다니는 생활을 했다고 했다. 처참한 영락이었다. 한참 꿈을 이룰 사십대 초에 꺾여서 삶이 무너지고 이제는 공원벤치에 가서 하루를 보내는 육십대 중반의 노인이 된 것이다. 그는 지금도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 이슬이 비치면서 내게 이렇게 토해냈다.​

“내가 망한 건 그래도 참을 수 있어. 내가 싸인을 잘 못한 거니까. 그렇지만 남편의 성공을 바라고 뒷바라지한 아내의 한을 풀어주지 못하는 게 너무 미안해. 죄 없는 자식들에게도 그렇고.”

그의 불행은 그냥 바라다 볼 수 있는 남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 보증서에 서명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하려고 했다. 인간관계나 이성으로 판단할 때 나는 분명히 보증인이 되어 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내면에 있는 어떤 존재가 나를 말렸었다. 어떤 근거나 이유가 없는 직감이었다. 논리보다 그런 직감이 나를 위험한 순간 수렁에서 빼내는 경우가 더 많았다.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일을 진행했다가 그 친구 못지않은 고통을 당하기도 했다.​

변호사의 길을 가다가 보면 인생길에서 쓰러져 피 흘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그런데 더러는 악마가 고통받는 불쌍한 천사같이 위장을 하고 내 앞에 나타나 나를 현혹시키기도 했다. 나는 성경 속의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겠다는 우쭐한 생각에 악마의 손을 잡아주었다가 누명을 쓰고 사회적 사망을 선고받기 직전까지 간 적도 있다.​

이성은 천사로 위장한 악마를 도와주라고 했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내면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직감 같은 어떤 존재는 미소 짓는 탈의 뒤에 있는 악마를 분명 얼핏이지만 보여 주었었다. 그 존재의 메시지를 듣지 않은 잘못이었다. 40년 동안 논리와 추론이 중심기둥인 법을 해 왔지만 나는 이제는 나의 깊은 내면의 영혼에서 전해오는 메시지를 더 믿는 편이다. 그건 나의 영(靈) 속으로 들어온 성령(聖靈)이 보내는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