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은 한 시인의 말대로 잠시 소풍을 왔다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돌아갔을 때 하나님한테 수고했구나 하는 한 마디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하면 되는 게 아닐까.

얼마 전 법조인 출신 사회명사가 이런 얘기를 해주었다.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로펌대표인 김 회장의 자서전 출판기념회가 열렸는데 대단했어. 역대 총리부터 시작해서 정관계 인사 수백 명이 몰려들어 축사가 끝이 없더구만. 하버드대학 동창들도 몰려오고 연예인들을 불러 공연을 하고 그 양반 고교동창 합창단도 무대에 올라와 노래를 부르며 축하해 줬는데 세 시간이 지나도 지겹지가 않더라구. ​
김 회장 그 양반 칠십대인데도 기획력이 대단해. 보통사람이 아니야. 미국시민권이 문제되지 않았다면 예전 선거에서도 당선되고 지금쯤 대통령 후보일 거야.”​

법조계 안에서도 나는 쳐다보기 힘든 금수저들이 있다. 명문고와 대학의 수석합격에 수석졸업이 기본이다. 판사가 되고 재벌가의 사위로 스카웃이 된다. 미국의 하버드나 예일대에 유학해 박사가 되고 대형 로펌을 만들어 굵직굵직한 재벌회사와 국제무역관계의 사건들을 독점해서 돈을 쓸어 모은다. ​

​그리고 마지막에는 정계진출을 해서 권력의 핵심이 되기도 했다. 세상은 위로도 밑으로도 끝이 없었다. 돈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재능도 주고 싶은 사람에게만 넘치게 주시는 것 같았다. 하나님 마음이니 불평할 수도 없다.​

그 출판기념회의 사회를 본 명사도 법조계 내의 번쩍거리는 금 같은 존재였다. 그는 텔레비전 시사프로의 명 사회자였다. 그가 인기 절정일 당시 서울시장을 거쳐 대권을 잡을 것이라는 관측들이 심심치 않게 나왔다. 그는 환경과 재력 천재적인 머리를 모두 갖추었다. 한번은 후배인 내가 부러워하자 이런 말을 했다. ​

“초등학교를 다닐 때 교장선생님이 나보고 최고명문인 경기중학교 수석으로 합격을 하라고 했어. 중학교 입시에서 수석을 하지 못했다고 교장선생님한테 아주 혼이 났지. 당시 경무대 앞을 거쳐 학교에 갔는데 산책하던 이승만 대통령이 가끔 만나면 머리를 쓰다듬어 줬지.
​대학시절 행정고시를 합격하고 엘리트 들이 모이는 경제부처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보니까 검사를 하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그래서 사법고시를 보고 검사가 됐지. 검사가 되니까 그 물에서 노는 게 따분해지고 하버드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싶더라구. 그래서 유학을 가서 공부를 마쳤지. ​
​돌아와서는 서울대 교수를 할까 로펌 대표를 할까 검찰의 고위직으로 들어갈까 망설여지더라구. 매스컴에서 시사프로 사회를 맡아 하고 정계에 진출하라고 하더라구. 내 이름으로 된 토크 쇼를 했지. 시청률이 최고였지. 그런데 세월이 지나 보니까 더 좋은 자리를 찾아서 옮겨 다니던 내가 좋은 게 없었어. 한 군데 붙박혀 있던 친구들은 최소한 장관으로 다 정상까지 갔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어.”​

본인은 인생의 회의 같은 하소연이지만 나는 자랑같이 들리기도 했다. 나는 그들을 존중해 주었지만 속으로 진정으로 부러워한 적은 없었다. 행복의 총량은 결국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 창문에도 아름다운 석양은 비쳐 들어오고 맑은 고드름은 무지개 빛깔을 뿌리면서 매달려 있다. 타고난 행운을 가진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게 된 계기가 있었다. ​

​내게 답을 준 것은 의사출신 영국작가 크로닌이 쓴 몇 권의 소설들이었다. 영국의 사회도 금수저와 흙수저가 존재했다. 대도시의 대학병원에서 최고의 학문적 업적과 수술기술을 자랑하는 스타급 의사가 있었다. 또다른 의사는 탄광촌의 보잘 것 없는 작은 병원까지 흘러 들어간 의사였다. 도시의 스타의사는 화려한 파티에 초청이 되고 돈이 쏟아져 들어오는 생활을 했다. ​

​탄광촌 의사는 낙반사고 때 어두운 막장까지 들어가 바위에 깔린 광부를 현장에서 수술하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는 금세 붕괴될 것 같은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나는 그 소설을 읽으면서 사회에서 밀려 광산촌으로 가게 된 의사에게 더 매력을 느꼈다. 한 마리의 불쌍한 양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더 보람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내면의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에 있는 게 아닐까.​

얼마 전 우연히 영등포 골목길에서 노숙자들에게 의료봉사를 하는 요셉병원의 모습을 텔레비전 화면에서 봤다. 백발의 노(老) 의사가 초라한 진료실의 낡은 철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소박한 모습과는 달리 그는 유명 대학병원의 교수출신 의사라고 했다. 그가 정년퇴직을 하고 요셉병원을 맡게 된 심정을 이렇게 얘기했다. ​

“여기를 인생의 마지막 소풍 장소로 삼으려고 합니다.”​

갑자기 그가 앉아있는 초라한 진료실이 고급호텔의 화려한 파티장보다 더 숭고하게 보였다. 겸손하게 아래로 내려오는 노 의사의 얼굴에서 빛이 배어나오는 것 같았다. 얼마나 정관계의 화려한 인맥을 가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여성대법관이 퇴직 후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고 구청민원실에 앉아 찾아오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면서 조용히 민원봉사를 한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그런 소박한 그 모습이 가슴에 더 감동을 주는 것 같았다. ​

​이 세상은 한 시인의 말대로 잠시 소풍을 왔다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돌아갔을 때 하나님한테 수고했구나 하는 한 마디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하면 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