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가 주장하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으면 판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판사든 상대편 변호사든 글을 어떻게 쓰라 말라 할 권한은 없는 것 아닐까요? " 법원 담 가에는 목련꽃이 하얀 등불같이 가지 위에 놓여있었다. 나는 한낮의 항소심 법정으로 들어갔다. 로펌에서 나온 상대편 변호사 두 명이 먼저 나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명은 법원장을 지낸 육십대 초반이었고 다른 한명은 그 밑에 있는 젊은 변호사 같았다. 이미 일심에서 여러 번 관계를 맺었다. 법원장을 지낸 변호사는 육십 고개를 넘었는데도 오랜 판사생활의 버릇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증인신문을 할 때였다. 그가 옆의 상대편 변호사석에서 듣고 있다가 불쑥 끼어들면서 “어떻게 그렇게 자기에게 유리한 사실만 집요하게 끌어냅니까? 하지 마세요”라고 소리쳤다. 그가 데리고 온 증인을 몰아세우니까 나의 입을 막는 것이다. 내가 신문을 할 때마다 그는 얼굴을 붉히면서 입을 막으려고 했다. 성격이 급한 사람 같았다. 오랜 판사생활이 인격을 길러주지는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일심에서 소송은 내가 이겼다. 이겨야 정의가 실현되는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악질 기획사에 묶여 노예계약을 체결한 가수를 그 공포에서 해방시켜주려고 내가 제기한 소송이었다. 밥도 제대로 먹이지 않고 하룻밤에 여러 나이트클럽의 무대에 서게 했다. 반항할까봐 건달들을 동원해서 겁을 주기도 했다. 출연료도 주지 않았다.

연예인들이 곡마단의 원숭이처럼 그렇게 사육되는 어두운 시절이 있었다. 나는 그들을 채찍으로 부리던 사육사를 법정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기획사는 대형로펌의 쟁쟁한 변호사들을 동원했다. 법정에 내는 그들의 전문지식을 총동원한 서류들은 번쩍거렸다. 이윽고 항소심 법정에 담당판사가 나왔다. 심리가 시작됐다. 그 순간이었다. 상대측 변호사가 나를 보면서 이렇게 입을 열었다.

“변호사가 법정에 제출하는 서면은 논리적 합리적인 글을 쓰는 겁니다. 그런데 엄 변호사가 쓴 내용을 보면 제 의뢰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제 의뢰인인 기획사 대표님이 지금 펄펄뛰고 있어요. 앞으로는 그 따위 식으로는 쓰지 마세요. 언제 섹스비디오 테이프를 찍었는지 마약으로 가수들을 꼼짝 못하게 했는지 증거를 대란 말입니다.”

그는 핏대를 올리면서 소리쳤다.

“저는 가수에게 자유를 찾아주려고 법정에 올리는 글을 썼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때리는 걸 법에 고발해야 하는데 상대방의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폭행을 어떻게 논리로 쓰죠? 건달이 있는 배경 속에서 느낀 공포를 어떻게 합리적으로 쓰라는 거죠? 노예계약에서 풀어주려면 그런 여러 부당한 것을 법에 호소해야 하는 게 변호사인 저의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증거가 없는 건 쓰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가 맞받아쳤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얻어맞았어요. 증거가 없죠. 그럼 안맞은 겁니까? 확실한 판결이 나온 게 없으니까 어느 누구도 입을 벌려서는 안 된다는 겁니까?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한다는 건 그럴듯한 근거가 없으면 진실도 존재하지 않는 건가요?”

내가 항변하면서 마지막을 덧붙였다.

“변호사가 주장하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으면 판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판사든 상대편 변호사든 글을 어떻게 쓰라 말라 할 권한은 없는 것 아닐까요? 그냥 댁이나 잘 쓰세요. 논리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말이죠. 나는 범죄나 불법행위는 비논리고 비합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러니 쓰는 것도 그걸 그대로 묘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법조인으로서의 직업관도 변호사마다 달랐다. 나는 고통 받는 사람을 그냥 있는 대로 보고 싶었다. 일단 아픔에 공감해 주는 게 위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아픔들을 생생하게 서류 위에 묘사해 판사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따금씩 공격을 당한다.

인간의 아픔을 논리라는 틀로 보려는 변호사들도 많았다. 판사들 중에는 사람을 대하는 게 아니라 기록을 통해 단순한 하나의 사건사무로 보는 경우도 있었다. 법 이론이나 조서를 통해 사람을 보지 말고 직접 인간을 보고 그 아픔을 알려주는 변호가 그렇게 유치하고 못마땅한 것일까? 그들보다 더 세상을 산 나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노년에 고인물 같이 적막하게 있는 것보다 더러 이렇게 한바탕 싸우는 게 건강에 좋다고 한다는 말로 위로를 삼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