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마지막에 병원에서 자신의 시신(屍身)을 의과대학생들의 연구교재로 써 달라고 유언을 하고 저 세상으로 건너갔다. 변호사를 하면서 더러 부자를 만날 때가 있다. 돌아가신 한 부자 영감님은 일제시대 중학시절 아버지에게 농토를 물려받아 지주였다고 했다. 당시는 천석군, 만석군이라고 해서 일 년에 쌀을 몇 석 추수하느냐가 부의 척도였다. 그 영감님은 만주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서 연 삼십만 석을 수확했다면서 학생지주님이라고 불렸다고 했다. 조선 최고의 갑부였던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농장의 일부를 그의 이름으로 해 주었었다.

나는 그 시절을 만주에서 가난한 농민으로 살았던 할아버지의 얘기를 종종 듣곤 했었다. 하루 종일 먼지가 이는 메마른 땅에서 밭을 갈아도 밥을 먹기가 힘들어 강을 건너 러시아로 건너가 소를 돌보는 일꾼을 하다가 두만강을 건너 조선으로 넘어왔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어린 내게 만주에는 먹는 흙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 시절 나는 진짜 맛있는 흙이 존재하는 줄 알았다. 그러다 세월이 지나면서 극한의 굶주림 속에 유랑농민들이 흙까지 먹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는 육이오 전쟁 때 군인으로 끌려갔다. 백마고지에서 전투를 하면서 너무나 배가 고플 때 동료들과 함께 떡같이 부드러운 다이너마이트를 먹으면 달짝지근하더라고 말을 해 주었었다.

빈곤이 일상화된 주변 환경 속에서 살았던 나는 빈곤을 느끼지 못하고 자랐다. 후일 변호사가 되어 진짜 부자들을 본 후에야 상대적으로 과거에 가난했던 걸 깨달았다. 가난한 우리 집안이 가난을 느끼지 못했듯이 부자도 부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가 만났던 30만 석 학생지주 영감님은 중학교 시절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아버지가 조선인 최고의 부자라고 학생들에게 말해주기 전까지는 부자인 줄을 몰랐다고 했다. 아무리 땅이 많고 재산이 있어도 아버지가 무서울 정도로 철저하게 검소한 생활을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했다. 녹이 슨 양철로 만든 필통이 찌그러질 때까지 쓰고 검은 물을 들인 면으로 된 교복도 하얗게 바래고 무릎에 구멍이 뚫릴 때까지 입었다고 했다. 집안에서의 반찬의 종류와 양도 아버지가 제한을 했기 때문에 항상 배가 고팠다고 했다.

부자라는 신분 때문에 해방이 되자 학교에서 좌익학생들한테 툭하면 몰매를 맞기도 했다고 했다. 그런 검소한 부자의 부(富)는 오래 가는 것 같았다. 세상이 변하고 정권이 변해도 그는 수백만 평의 숲과 땅 그리고 염전을 가지고 있었다. 어릴 때 길들여진 검소함은 노인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서민들조차 외제차를 할부로 사서 과시하고 다닐 때 그 부자영감님은 대우에서 나온 단종 된 아카디아를 20년 이상 사용하고 있었다.

그의 사무실은 폐품처리장에서도 받지 않을 낡은 비닐소파와 일제시대부터 쓰던 나무책상이 놓여 있었다. 20년 이상 된 낡은 자켓에 구겨진 면바지와 농구화를 신고 다니는 영감을 주변에서는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보기도 했다. 길거리의 스타벅스 커피점에서 아메리카노를 직접 두 잔 사서 내게 주면서 커피 값이 너무 비싸다고 하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서 가진 재산들은 익숙한 생활의 일부일 뿐이었다.

그 부자 영감님을 보면서 나는 부자에 대한 편견을 버렸다. 진짜 부자는 교만하지 않았다. 철저히 낮은 데로 임하고 겸손했다. 졸부가 턱없이 건방진 것이다. 그들의 공허한 정신 속에 건방이 허풍선처럼 들어찬 것이다. 그 부자 영감님은 일생 남들 앞에 나서지 않았다. 뒤에서 조용히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에 병원에서 자신의 시신을 의과대학생들의 연구교재로 써 달라고 유언을 하고 저 세상으로 건너갔다. 절대로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는 그의 선행도 많은 것 같았다.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를 칭찬하지만 우리에게도 그런 청빈한 부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