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업무는 좋지 않은 겁니다. 남이 신뢰하고 해주는 얘기를 뒤에 와서 첩보로 만드는 그 자체가 배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변호사를 개업했다가 잠시 정보수사기관에서 일한 적이 있다. 인권운동과 반대쪽은 어떻게 움직이나 궁금하기도 했었다. 그 당시 조용히 내게 다가와 타이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나보다 몇 살 위인 그는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가진 엘리트 직원이었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정보 업무는 좋지 않은 겁니다. 남이 신뢰하고 해주는 얘기를 뒤에 와서 첩보로 만드는 그 자체가 배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보업무는 혹시 시켜도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수사업무도 피하십시오. 명분은 그럴 듯해도 한 인권을 유린하는 죄 짓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조직과는 상반되는 그의 말이었다. 정보수사기관의 역기능을 보아온 그의 정직한 조언에 감사했다. 나는 그곳에서 권력가의 탈 뒤에 있는 속성을 얼마간 보고 나왔다. 나는 그를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준 천사라고 생각했다. 이기주의적 치열한 경쟁의 세계 그리고 감시가 철저한 조직에서 잘 모르는 그가 그런 말을 해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생각하지 못한 때에 나의 가슴을 울리게 하는 말들을 전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곳에 있을 때 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직급이 낮지 않았는데도 항상 소박한 차림에 겸손하게 행동했다. 경쟁자들이 한 직급이라도 상승하는 사다리를 타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때 그는 무심히 그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우리는 사회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신학대학을 나오고 목사가 됐다. 목사가 되고나서도 그는 수도승같이 혼자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는 혼자 살고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한다. 더러 오후에는 산책을 하고 다시 깊은 묵상에 들어가는 생활이었다. 몇 달에 한 번씩 그와 만나 차를 마시면서 진리에 대한 얘기를 해 왔다. 며칠 전 그와 동네찻집에서 만났다.

“요즈음은 어떤 재미에 빠져 사십니까?”
내가 물었다. 그도 나이가 칠십이 가까웠다.

“성경을 읽으면 젊었을 때와는 달리 성경의 페이지에서 창문이 활짝 열리면서 내가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걸 깨닫게 될 때가 있어요. 성경은 역시 머리로가 아니라 성령이 해석해 줘야 알 수 있는 거죠. 수많은 신학서적을 저는 신통치 않게 생각합니다.”

“깊은 묵상에 들어가면 어떤 상태가 됩니까?”
“말로 그 느낌을 묘사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영과 내가 일체가 되는 걸 느낍니다. 그때 느끼는 희열은 대단하죠. 세상에 아무것도 부럽지 않아요.”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제 몸은 단순한 껍질에 불과할 뿐입니다. 저한테 성령이 들어오시면 그 성령이 저를 움직이게 하는 겁니다. 그 성령에게 모든 걸 맡기고 나는 그저 껍데기로 삽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를 하더라도 거기에 자기가 들어가면 의미가 없어집니다. 자기는 단지 도구에 불과하고 속에 있는 성령이 행해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속의 자아를 십자가에 매달아 없애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너는 다만 가만히 기다리면서 나와 교제하면 된다. 조용히 있으라 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렇게 혼자 살고 있습니다.”

그는 골방에서 성경만 읽고 사는 것 같아서 물었다.

“목사님은 서울대를 나오시고 박사학위도 따고 공직에서 일을 하시기도 했는데 수십만 명의 신도들 앞에서 설교를 할 꿈은 없는 겁니까?”
“학벌이 좋다거나 사회적 경력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를 방해하는 큰 장애물입니다. 그게 여러 겹이 끼어 있으면 그만큼 깨닫는데 힘이 드는 겁니다. 자신을 노바디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고난이라는 과정만 거치면 바로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죠. 거지 나사로처럼 말이죠. 그런데 배웠다는 사람이나 신학교 졸업장을 가진 사람들은 성령을 받기가 힘든 것 같아요. 세상에서 주는 자격은 성령을 받아들이는데 방해가 되니까 말이예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어떤 배역을 맡아도 감사하게 살아야 합니다. 연극의 처음에 잠시 얼굴을 비쳤다가 사라지는 단역이라고 해도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무대에서 내려오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일종의 운명론 같은 것일 수도 있군요?”
“제가 성경 속의 한 예를 들죠. 야곱이 길을 떠나 들에서 돌베개를 베고 잘 때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죠. 그런데 야곱이 어떻게 했습니까? 뭐든지 자기 머리로 하려고 하고 자기 의지를 가지고 행동했죠? 결국 돌고 도는 인생에 사기꾼 야곱이라는 소리도 들었죠. 그가 그냥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했으면 그렇게 돌고 도는 인생을 살지는 않았을 겁니다.”

젊었을 때는 뭔가 혼자 이루어보려고 아둥바둥했었다. 그런데 늙어보니 모두가 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정해진 운명의 길에서 한 발자국도 옆으로 빠져나오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깨달은 게 있다. 하나님은 직접 껴안아 주시지 않았다. 옆의 사람을 통해 나를 껴안아 주셨다. 직접 말을 해 주시지도 않았다. 수도승 같은 그를 보내 내게 알려주시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