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부터 1993년까지의 초기 남북대화에 참가했던 필자는 이 기간 중은 물론 그 이후 지금까지도 세 권의 책으로부터 북한과 대화하는 데 관하여 참고가 되는 교훈을 주로 얻고 있다. 프레드 찰스 이클레(Fred Charles Ikle)의 <국가들은 어떻게 협상하는가>(How Nation Negotiate) (New York, Evanston and London; Harper &; Row Publishers, 1964)와 알프레드 D. 빌헬름 2세(Alfred D. Wilhelm, Jr.)의 <중국공산주의자들의 협상술 – 방식과 특징>(Chinese at the Negotiating Table - Style and Characteristics) (Washington, D.C.; National Defense University Press, 1994) 및 C. 터너 조이(C. Turner Joy)의 <공산주의자들은 어떻게 협상하는가>(How Communists Negotiate) (Admiral C. Turner Joy, USN (Ret.)가 그것들이다.   

이 세 권의 책들은 냉전시대 공산주의자들의 협상관이 서방 세계의 우리의 그것과 어떻게 얼마나 다른 것인지를 설파(說破)하고 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관하여 주옥(珠玉) 같은 조언(助言)을 제공하고 있었다. 이들에 의하면, 특히 냉전시대 공산주의국의 경우 ‘협상’은 그들과 우방국(友邦國)들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일 뿐 적대국(敵對國)과의 사이에는 원천적으로 ‘협상’의 존재를 부정하여 이들과의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는 ‘흥정’을 내용으로 하는 ‘협상’이 아니라 그들의 일방적 주장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담판(談判)’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양보’를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전취(戰取)하는데 실패한 것을 협상장에서 얻어내려는 꼼수”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지구 차원에서 동서냉전이 종식된 지 30년이 가까워 오고 있지만 유독 북한만은 지금도 변함없이 냉전체제에 집착한 채 국제적 고립을 고수하면서 서방세계와의 일전불사(一戰不辭)를 외치고 있다. 핵과 미사일을 휘두르는 북한의 무력도발 행위가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험선(危險線•Red Line)을 넘나들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위험선을 이미 넘겨 버렸는지도 모르게 되어 있는 것이 절박하기 그지없는 한반도의 안보상황임에도 대한민국 대통령인 문재인(文在寅)이라는 정치인은 이 순간에도 이미 북측의 수용 거부로 폐품(廢品) 처리된 지 오래인 ‘흘러간 노래 가락’들을 이른바 ‘신 한반도 평화비전’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패키지로 재포장하고 이것을 내흔들면서 ‘대화’를 구걸(求乞)하는 구차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결국, 문재인 씨와 대북정책에 관하여 그를 측근에서 보좌하는 참모들이 실상(實相)과 배치되는 몽상(夢想)의 지배를 받거나 아니면 북한의 기만과 선동에 놀아나서 ‘종북(從北)’의 함정에 빠진 결과로 레닌이 말한 ‘유익한 바보들(Useful Idiots)로 구실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아니 하기 어렵게 되어 있는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세 권의 서적 가운데 필자에게 특히 일상적인 지침서(指針書)가 되었던 것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어떻게 협상하는가>였다. 이 책의 저자인 C. 터너 조이 예비역 해군소장은 미 7함대 사령관 및 주한 미 해군사령관으로 6.25 전쟁에 참전하는 도중 1951년부터 다음해 까지 판문점 휴전회담 유엔군측 수석대표로 공산군측의 남일(南日) 북한군 총참모장과 셰팡(解方) 중공군 참모장을 상대로 휴전협상을 진행하다가 1952년 여름 맥아더 장군 해임 이후 유엔군축 수석대표 자리를 도중 하차(下車)한 뒤 1964년 휴전협상 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이 소중한 책을 엮어서 출판했다. 필자는 오늘 조이 제독의 이 책 가운데 결론 부분인 “제9장: 이 가시 밭과 상처들이 주는 警告들”을 발췌, 번역하여 아래에 게재한다. 모쪼록 문재인 씨를 비롯하여 그의 정부에서 대북정책 수립과 추진에 관계하는 인사들이 읽고 참고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李東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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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이 가시밭과 傷處들이 주는 警告들  

한국 휴전협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중요한 요소는 미국이 침략자 중공을 응징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1950년 겨울 중공군은 만주에서 압록강을 건너서 한반도로 들어와서 미 8군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모든 증거로 볼 때 이 공격이 중공 정부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미국은 이로 인하여 심각한 군사적 타격과 병력의 손실을 감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공의 영토와 군사시설에 대한 보복적 군사행동을 자제했다. 한국전쟁 휴전협상에서 유엔군 사령부 대표들이 겪은 어려움은 대부분 중공의 침공에 대해 즉각적인 응징을 가하지 않은데서 초래된 것이었다.   

도발하지 않은 공격을 받고도 겁쟁이처럼 후퇴하는 미 극동군의 약한 모습을 보고 공산군측이 미국은 미국에 대한 도전에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은 무리한 일이 아니었다. 이 같은 미국의 유약한 자세는 당연히 한 가지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정부에게 공산군측이 내놓는 휴전조건을 수락하지 않으면서 아무런 결실도 기대되지 않고 환영 받지도 못하는 전쟁을 계속 수행할 만한 결단력이 있는냐”는 의문이었다. 한국전쟁 휴전회담 내내 공산군측이 보여 준 행태를 보면 그들은 우리에게 그 같은 결단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음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사실이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하기 위하여 미국이 16개 유엔회원국군의 참전을 주도했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원의 80% 이상을 공급했으며 한국을 제외한 어떤 다른 참전국보다도 더 많은 인명 피해를 감내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미국의 결단력에 대한 그 같은 의구심은 타당성이 없다. 미국이 솔선하여 이 전쟁에서 주도적 역할을 떠맡지 않고 신속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한국은 이미 공산군에게 정복되어 그 지배를 받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특기할 일은 그 유명한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이 특히 중공에 대해 강력하고 공격적인 정책을 주장하다가 해임된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공산군측은 미국을 ‘종이호랑이’로 취급하게 되었다.   

1951년6월24일 소련의 말리크(Yakov Malik) 외상이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유엔군과 공산군이 38선에서 양측의 일정한 거리 밖으로 물러나는 것을 조건으로 양측 군사령관이 휴전에 합의할 것을 제의하자 미국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사령관에게 “유엔군사령부는 ‘휴전을 논의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즉시 공산군측에게 통보하라”고 지시했다. 이 같은 미국의 조치는 공산군측으로 하여금 “유엔군이 휴전을 서두르고 있고” 그 같은 조바심 때문에 “미국이 38선을 다시 군사분계선으로 수용하려 하고 있다”고 인식하도록 유도함으로써 그 뒤 무익한 협상을 하는 데 수개월의 귀중한 시간과 엄청난 추가적 인명 피해를 감수하게 만들었다.  

한국전쟁 휴전협상을 통하여 우리가 획득한 여러 가지 교훈 가운데 하나는 “적이 휴전을 원할 때는 절대로 압박의 고삐를 늦추지 말고 오히려 압박의 강도를 증가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엔군은 휴전협상이 시작된 이후 모든 화력을 총동원하여 공세의 고삐를 더욱 조였어야 했다. 협상의 결정적 관건은 힘이다. 힘이야 말로 공산주의자들이 제대로 알아듣는 유일한 진리다. 휴전협상이 시작되는 시점에 공세를 취했을 경우 이로 인하여 불필요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공세 작전을 펴지 않으면서 장장 2년여의 시간을 협상에 허비하는 동안에 전장에서 발생한 인명 피해의 규모는 1951년 휴전협상 시작과 동시에 공세를 강화했을 경우 발생했을 인명 피해보다 훨씬 컸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앞으로도 공산주의자들과의 휴전협상을 우리가 바라는 시간 안에 소망하는 내용으로 타결시키기를 희망한다면 휴전에 의하여 교전행위가 종결되는 순간까지 절대로 전투를 중단시켜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합리적인 시간 안에 수용 가능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차라리 협상을 중단하고 공산군측이 협상 재개를 절실하게 원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지 않고 무익한 협상에 질질 끌려 다녔기 때문에 공산군측은 우리가 약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우리가 보여주는 약세(弱勢)는 공산군측을 고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공산군측의 협상 제의에 대해 우리가 서둘러서 반응해서도 안 된다. 1951년 유엔군측은 말리크 소련 외상이 휴전 가능성을 언급한 때로부터 불과 2주일 후에 개성(開城)에서 공산군측과 마주 앉았다. 이 2주일의 시간은 휴전협상 시작이 가져 올 파장에 대해 분석하고 대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더구나, 1951년처럼 전장 상황이 우리에게 유리한 때 휴전협상을 서두른 것은 당치 않은 일이었다.   

한국전쟁 휴전협상을 통하여 터득한 또 하나의 교훈은 “단지 협상을 진행시킬 목적으로 대가 없이 양보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협상에서 그들의 견해나 입장을 수용할 때는 반드시 공산군측으로 하여금 우리측의 양보에 상응하는 양보를 요구하여 반드시 대가(代價)를 지불하게 해야 했었다. 그렇게 했다면 우리는 주어진 시간 안에 2배 이상의 합의를 생산하면서 공산군측에게 우리가 저능아(低能兒)나 속기 쉬운 사람이나 또는 유약(柔弱)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해 줄 수 있었을 것이었다. 공산군측과 협상할 때는 혹시 다루는 사안 중 어느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금물(禁物)이다. 사소한 사안이라고 해서 공산군측에게 동등한 양보를 받아냄이 없이 양보할 경우에는 공산군측으로 하여금 우리가 매사에 쉽사리 양보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해 주는 것이다. 우리가 양보를 할 때는 크고 작은 사안을 가림이 없이 그들로부터 동등한 양보를 받아내는 것을 반드시 관철해야 한다.  

서두르는 태도는 반드시 버려야 한다. 그 같은 태도는 그들로 하여금 우리가 시간에 쫓기고 있다고 판단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산측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협상을 끝내거나 중단할 용의가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합리적인 시간 안에 가시적인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미련 없이 협상을 중단해야 한다. 공산주의자들과 협상할 때는 사전에 의제를 면밀하게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 공산주의자들과 합의에 도달하는 합의 내용의 어떠한 부분에 관해서도 상대방의 ‘선의(善意)’에 기대를 걸어서는 안 된다.   

한국전쟁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가 배운 또 하나의 교훈은 “회담을 개시하기 전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정치적 목적을 먼저 구체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엔군측 휴전회담 참가자들은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 정부의 정치적 목적이 카멜레온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을 체험해야만 했다. 미국은 당초 남한 정부의 임박한 붕괴를 막고 북한의 무력 남침을 격퇴한다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이 두 가지 정치적 목적은 북한침략군을 38선 이북으로 격퇴시킴으로써 달성되었다. 그러자, 미국의 정치적 목적은 한반도의 통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유엔군은 38선을 돌파하여 압록강으로의 북진(北進)을 강행했다. 중공군이 참전하자 미국 정부의 정치적 목적은 중국과의 전면전(全面戰)을 회피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소련이 휴전을 제안하자 이제 미국 정부의 정치적 목적은 이른바 ‘명예로운 정전(停戰)’을 달성하는 것이 되었다. 휴전협상이 시작되자 미국 정부의 정치적 목적은 공산측과의 정치선전전(政治宣傳戰)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또 바뀌었다. 이 같이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정치적 목적은 그때그때 군사적 상황에 따라 풍향계(風向計)처럼 바람 부는 대로 수시로 바뀌는 것을 반복했다.   

휴전회담 대표단은 물론 리지웨이 사령관까지도 워싱턴으로부터 언제 새로운 훈령이 하달될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전전긍긍(戰戰兢兢)하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회담을 진행시켜야만 했다. 유엔군 대표단은 그 시점의 대표단의 입장이 최종적인 것인지 아닌지, 협상이 종료될 때까지 미국 정부의 흔들림 없는 확고한 지지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확신이 없이 사안마다 일일이 워싱턴의 조언을 구해야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협상에 들어 갈 때는 사전에 추구하는 정치적 목적을 확실하게 수립하고 회담 대표단에게 이를 숙지시켜야 하며 일단 회담이 시작된 뒤에는 국가이익에 관계되는 매우 중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같은 정치적 목적을 결코 변경해서는 안 된다는 값비싼 교훈을 체득하게 되었다.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에서 우리가 무력 사용 가능성을 포기할 것이라고 그들이 믿게 만드는 꼬투리를 제공하는 것은 절대적 금물이다. 우리는 그들이 오히려 우리에 의한 무력 사용이 임박했다는 위협을 실감할 때라야 그들 세계와 우리 세계 사이의 핵심적 쟁점을 해소시키기 위한 실질적 협상에 진지한 자세로 임한다는 것을 한국전쟁 휴전협상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전쟁을 피하려 한다면 전쟁의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서방세계와의 쟁점 해결 노력이 실패할 경우 그들이 심각하고 급박한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실감할 때라야 비로소 진지하게 쟁점 해결에 나선다. 그들은 으름장에는 결코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미국이 현실적 대안(代案)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사용할 능력과 의지를 보여 줄 때라야 그들은 의미 있는 협상의 자리에 나서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비록 세계대전의 위험이 수반되더라도 이를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공산주의자들이 전쟁을 선택하는 경우에는 우리가 어떻게 하더라도 전쟁은 불가피해지고 회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한국전쟁 휴전협정은 1953년에 체결된 내용으로는 체결되지 않았어야 했댜.  

맥아더 장군은 “전쟁에서 승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갈파(喝破)한 바 있다. 그러나, 현재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우리가 전개하고 있는 보다 폭넓은 투쟁은 대포와 함선과 항공기만을 가지고 싸우는 전투가 아니다. 공산주의자들과의 이 투쟁은 무력 위협은 물론 이념과 외교 공작 그리고 경제적 압력이 총동원되어 수행되고 있다. 이 싸움은 끝장을 보아야 하는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도 승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중대한 전쟁에서 자유가 승리자가 되려면 우리는 자유를 수호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경우에 한하여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에 나서야 한다. 우리는 적이 원한다는 것을 이유로 협상에 나서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단지 힘을 가진 입장에서가 아니라 힘을 사용하여 협상에 나서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