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노란 국화가 담긴 병을 나의 작은 책상 위에 놓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삼십 분 후에 올 테니 이것만 보고 있다가 뭐가 느껴지는지 말해라”
작달막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교사가 사립 고등학교의 한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시(詩)를 가르치고 있었다. 부자나 고급관료의 자식들이 다니는 좋은 학교였다. 매년 일류대학에 다수 합격하고 사회 명사(名士)를 배출한 전통 있는 학교였다. 갑자기 그 교사가 한 학생을 지명해 물었다.

“너는 뭘 하려고 공부하니?”
“저는 의사가 되려고 합니다. 부모님의 뜻이기도 하구요.”

교사는 또다른 학생을 보며 물었다.
“너의 희망은 무엇이니?”
“저는 로스쿨을 가서 변호사가 되려고 합니다.”

“너희는 시(詩)가 뭐라고 생각하니?”
교사가 아이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이들은 침묵하며 대답하지 못했다. 교사는 싱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법률이나 의학은 인생을 살아가는 도구지만 시(詩)는 인생의 목적인 거야.”
깊은 의미를 담은 말이었다.

교사는 갑자기 교탁 위로 올라가 섰다. 교실에 있던 아이들이 의아한 눈길로 선생을 올려다보았다. 교사가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얼마 안 되는 높이지만 이 시각에서 보면 교실도 너희들도 달라 보여. 시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지는 거야. 너희들도 한번 나를 따라 여기 올라와 봐.”

교사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교탁 위에 올라와 서게 했다. 교사에 의해 아이들의 마음이 열리고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있었다. 추석연휴에 집에서 틀어놓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한 장면이었다.

그 영화를 보면서 나는 54년 전의 아득한 기억의 골짜기로 안개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아이들이 다 돌아간 초등학교 4학년 텅 빈 교실에 내가 앉아 있었다. 청소가 끝난 후 담임선생님이 남아 있으라고 했다. 담임선생님은 교육대학을 갓 졸업하고 부임한 이십대 초의 청년이었다. 선생님은 교실 앞 선생님 책상 위에 놓여있던 노란 국화가 담긴 병을 나의 작은 책상 위에 놓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삼십 분 후에 올 테니 이것만 보고 있다가 뭐가 느껴지는지 말해라”
선생님은 교실에서 나갔다. 텅 빈 침묵 속에서 나는 국화를 응시하고 있었다. 눈이 부신 환한 노란색이 나의 마음까지 물들이는 것 같았다. 싱그러운 향기가 코를 통해 폐 깊숙이 들어왔다. 나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냥 무심히 국화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선생님이 돌아와 조용히 내게 물었다.

“뭐가 느껴졌니?”
나는 내가 뭐를 느꼈나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국화에 가을이 들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나를 교실 앞 자신의 책상 쪽으로 데리고 갔다. 선생님은 의자에 앉아 책상서랍을 열고 대학노트 한 권을 꺼내 내 앞에서 펼쳤다. 펜으로 잉크를 찍어 쓴 글들이 하얀 노트에 빼곡이 들어 차 있었다.

“이게 내가 쓴 시(詩)들 이란다.”

아이의 마음을 열어준 좋은 선생님이었다. 먹고 살아야 하는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안정된 밥을 얻기 위해 나는 변호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 자격증은 삶의 도구지 인생의 목적은 아니었다. 나는 항상 문학이나 종교 쪽으로 시선을 향하며 살았다. 삶의 이정표는 그쪽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일류가 못되면, 상업적 성공을 못하면 실패로 여긴다. 깨달음이나 어떤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면 믿음도 성숙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삶의 목표만 제대로 됐다면 작으면 작은 대로 자기 그릇의 크기만큼 하루하루 간구하며 즐기며 사는 것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