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는 하되 불편한 간섭은 하지 않는 것, 요즘은 '말을 해야 안다'라고 가르치지만 말이 없어도 아는 세상은 있다.
며칠 전 어느 방송을 통해서 본 이야기다. 강원도 삼척 어느 산골에 할아버지 한 분이 살고 계신다. 굴피집(너와집)을 지어 평생을 그곳에서 살아오셨다고 한다. 주로 밭 일을 하고 틈을 내어 산 속에서 각종 버섯이나 약초 같은 것을 채집하여 삼척 시내에 내다 팔기도 한다.

할머니는 삼척 시내 아들네 집에 갔다가 눌러앉았다. 시장 안에 있는 어느 집 가게 앞에 양해를 얻어 전(廛)을 펴고는 인근에서 나는 채소 같은 먹거리를 구해다 진열하여 팔고 있다. 재미를 붙인 모양이다. 산 속으로 돌아가길 포기하였다.

며칠에 한 번씩 할아버지는 내다 팔 물건들을 챙겨 짊어지고 시내로 나간다. 산 속에서 한참을 걸어 내려와 버스를 탄다. 송이버섯 같은 고가품은 전문점에 넘기고 난전 판매가 가능한 것들은 할머니에게 팔라고 갖다 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부부이지만 이렇게 며칠에 한 번씩 만난다. 며칠 만에 만나도 특별히 반가워하는 모습이 없고 소 닭 보듯 서로 무심한 듯하다. 할아버지는 묵묵히 짐보따리를 풀어 물건들을 꺼낸다. 할머니는 짐보따리에서 나오는 물건에만 관심을 두는 듯하다.

그러나 유심히 보니 무심해 보이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얼굴 한 곁에서 애틋한 감정을 읽을 수가 있다. 사랑이란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라면 바로 이게 사랑이다. 배려는 하되 불편한 간섭은 하지 않는 것, 특별한 말이나 행동이 없어도 스쳐가는 눈빛 속에 한없는 배려가 깔려 있다. 요즘은 '말을 해야 안다'라고 가르치지만 말이 없어도 아는 세상은 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서로 딴 곳을 보는 듯하지만 무슨 변화는 없는지 슬쩍 안색을 살핀다. 할아버지의 마음은 할머니의 건강에 쓰인다. 폐가 안 좋아 병원 가서 정밀 진단을 받아보고 적절한 치료를 받게 하고 싶은데 할머니는 살 만큼 살았다며 극구 이를 마다한다. 그러나 내심 병원에 가져다주는 돈이 아까워 포기하는 것이다. 자식들은 물론 할아버지까지 힘들게 하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할아버지도 이를 알지만 할머니의 생각이 너무나 분명하니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할머니는 밥은 제대로 챙겨 먹는가 하는 듯 지나치는 시선으로 할아버지의 기색을 살핀다. 지금은 떨어져 지내며 며칠에 한 번씩 보지만 수십 년 산 속에서 같이 아이들 키우고 또 아이들이 대처(大處)로 나간 후에는 단 둘이서 살았으니 얼굴만 보면 그 생활을 빤히 읽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할머니가 쓰러지셨다. 자식들에 의해 병원에 실려 갔다. 콧구명에 산소공급 호스를 꼽고 병상에 누워 있는 할머니를 찾은 할아버지 표정에는 '그렇게도 말을 안 듣더니…' 하는 안타까움과 '올 것이 왔다'는 체념의 엇갈린 표정이 같이 묻어난다. 자식들은 직장으로 가고 손주들도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고 그렇게 둘이 남았다.

두 분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할머니는 아마 곧 세상을 떴을 것이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굴피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방송은 굴피집 이곳 저곳에 친 거미줄을 보여주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할머니의 죽음과 함께 할아버지가 산 속으로 돌아갈 이유도 없어졌을 것이다. 밭에다 고추를 심을 이유도, 산에서 약초를 캘 이유도.